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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역사

고려 역사 3편 정종

정종 안릉

고려의 제3대 국왕이자 태조의 셋째 아들로, 정종은 고려 출신의 첫 번째 군주로 23살에 즉위해 27살에 죽은 청년 군주로, 강력한 군사력과 지지 세력을 바탕으로 대학살을 시작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왕족과 호족 세력들 간의 군사적 내전과 정치적 싸움이 지속되는 와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동생 광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최후를 맞았습니다.

1. 즉위전

태조의 세 번째 아들이시나, 둘째 형인 왕태가 불행히도 요절하셨기에 사실상 차남으로 대우받으셨습니다. 왕자 시절에는 특별한 작호를 받지 않으셨지만, 훗날 즉위하게 된 왕소의 동복형으로서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선대 혜종은 사실 쓸 수 있는 대비책이 별로 없었습니다. 박술희, 왕규와 같은 친위 세력을 제외하면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종은 어머니, 장인, 누이뿐만 아니라 왕식렴 등 막강한 지지 세력을 앞세워 혜종의 세력을 위협했습니다. 혜종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왕규는 초반에 무리하게 왕요와 왕소 형제를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혜종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 외에도 그 세력 내부에서 박술희가 왕규와 대립하는 등 분열을 거듭하며 위기를 겪었습니다. 혜종은 왕건의 다른 아들들의 가문에 비하면 무척 미약했기에 보위에 오르더라도 늘 불안에 떨어야 했으며,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한편, 정종은 이미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즉위했기에 자신감과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충주의 대호족 유긍달의 딸 신명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형 혜종과는 달리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처가도 후백제의 부마였던 박영규와 견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문성왕후와 문공왕후의 집안이었습니다. 혜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을 왕식렴이 혜종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혜종이 맏아들을 둔 데도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왕요의 세력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증거입니다.

2. 즉위

정종은 즉위 후 개국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 왕규 일파를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적들을 제거해나가셨습니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했는데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칠 정도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마저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자만 무려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재위 1년 차인 946년,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친히 개국사에 행차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셨습니다. 불사리 봉안은 아마 인명 살상에 대한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3. 서경 천도

947년(재위 2년)에는 서경에 왕성을 쌓기 시작하셨습니다. 앞선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미 민심이 악화되었기에 정종은 개경에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려는 목적에서 서경(西京)으로 천도를 계획하셨습니다.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구실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상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서경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이점을 근거 삼아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장정들을 계속 뽑아 부역에 쓰게 되었고, 이 탓에 서경 백성들조차 중앙 조정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커녕 그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 붕어 직전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정종의 의지를 꺾을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4. 광군 편성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은 유학을 갔다가 거란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광윤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거란은 벼슬을 주어 생활하게 했고, 최광윤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려 정종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에 알렸습니다. 이에 정종은 재위 2년(947년)에 광군사를 설치하고 300,000명의 광군을 편성하여 병력을 모았습니다. 광군은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호족들이 통솔하는 지방군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광군의 편성은 중앙 정부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며, 이는 후대의 성종과 현종 시기에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광군은 호족의 사병을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광군의 인적자원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잔존한 광군은 사면 기광군이란 이름으로 축소되었으며, 동, 서, 남, 북 사면에 배치되어 특수 부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호족의 사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아 음전을 조금씩 가졌으며, 유음 기광군이라고도 불렸습니다.

5. 말년

이런저런 개혁들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심신이 약해진 정종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재위 3년차에 동여진 대광이 와서 특산물과 말 700여 마리를 바쳤습니다. 대광은 고려의 고위 향직 품계이며, 고려 국민이 아닌 동여진 사람이 대광 품계를 받은 이유는 그가 고려의 제후로 취급되어 고려의 관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종은 이 여진인을 천덕전에서 맞이하여 조공품과 하사품을 교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갑작스레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번개로 인해 여러 신하와 물품들이 피해를 입자 정종은 큰 충격을 받고, 결국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의 병이 더욱 악화되고,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중에도 정종은 계속하여 악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재위 4년 만인 949년 3월 13일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정종은 말년에 자신의 동생 왕소를 불러 선양한 뒤 내제석원에 머물다가 사망했습니다. 이후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하는 기록이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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