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은 고려의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기반을 다지며, 과거 제도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왕조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반기에는 무차별적인 숙청과 공포정치를 시행하여 후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북송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칭제건원을 포기하고 건덕이라는 송나라의 연호를 채택했습니다. 20년 넘는 재위 동안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고 조정의 기초를 다진 광종 대성대왕은 고려 역사상 중요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1. 즉위 전
태조와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들로 925년에 태어난 광종은 형태와 형 정종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러나 형태가 일찍 별세하고 형 태자 태가 먼저 떠나자, 광종은 왕위 계승의 중요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형 요와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부상했습니다. 왕소인 대성대왕 광종은 형 정종과는 판이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의 성격은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중했습니다. 최승로는 광종을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으면 과감하게 나아가는 대범한 성품"으로 평가했습니다. 뛰어난 용모와 자질을 지니고 있어 태조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태자 시절에 광종은 정종과 함께 왕실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깊었고,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왕위를 둘러싼 암투극에서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보전했지만, 동시에 왕위로 끌어올리려는 호족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그들을 제거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태조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복 형제와 혼을 맞추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이복 여동생이자 신정왕후 소생인 황보씨와 결혼했습니다. 황보씨는 외할아버지 황보제공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불렸습니다. 대목왕후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효화태자는 이듬해에 요절하고, 첫째 아들인 태자 주가 나중에 경종이 되었습니다. 딸들은 각각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흥덕원군부인으로 불렸는데, 흥덕원군부인은 흥덕원군 왕규와 결혼했지만 성종에게 재가했습니다.
2. 노비안검법
광종은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습니다. 이 법은 강제 및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다시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의 지배층인 호족들은 노비들을 소유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광종은 이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노비안검법을 통해 호족들의 군사력 및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해방된 노비들로부터 세금과 군역 의무를 징수하여 왕실의 재정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습니다. 이는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국가의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3. 과거제 실시
광종은 중국 후주 출신인 쌍기를 고려에 귀화시키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958년에 과거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시행된 것으로,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서처럼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한반도 사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과거제는 한국사 최초의 시험으로, 그 당시의 관료진출 방식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과거제 시험은 본시 계급이 아니면 합격하기 어려운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기 때문에 호족들에게 유리한 면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문과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호족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음서제가 함께 도입되면서 과거제의 효력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음서제는 고위 관직에 음서 출신만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과거제의 효과를 약화시켰습니다. 또한, 음서 출신자들만 진출할 수 있는 고위 관직은 귀족 계급에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제의 차별적 특성이 부각되고, 나중에는 과거제가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중요한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이 정책은 900년 넘게 실시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될 때까지 한반도 사회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왕권 강화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도전할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에게 냉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는 호족, 대신들 뿐만 아니라 가문 내부의 친척들에게까지 이르는 엄정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혜종의 아들인 흥화궁군과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을 역모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처형시켰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경종를 의심할 정도로 역모에 대해 예민했습니다. 945년, 혜종의 아들인 흥화궁군은 혜종이 죽자 출궁하여 어머니와 함께 절에서 살다가 광종 즉위 후 경화궁부인을 따라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960년 이후 발생한 왕실 내 분쟁 때에 광종은 흥화궁군을 처형했습니다. 또한,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도 같은 이유로 처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조의 15번째 아들인 효은태자 역시 군소배와 사귀면서 반역의 의도를 품고 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동시에 왕실 내부에서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매우 단호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왕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5. 호족 대숙청
호족 숙청의 시발점은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을 역모 혐의로 고발한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은 당시 상당한 실력자로 각각 4품과 3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가졌습니다. 광종은 역모 혐의를 받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소되어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대상 준홍과 왕동이 쫓겨난 후에도 광종의 주변에 대한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들이 제거된 후에는 희생자가 너무나 많아 따로 임시 옥사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부터는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들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들이 부모를 비방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게 되었고, 죄없는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인해 광종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후에는 공신들에게 관직에서 내쫓거나 새로운 관직을 주지 않았으며, 반대하거나 다른 왕자군의 배경세력인 외척 세력 호족들을 전면적으로 숙청하고 처형했습니다. 심지어는 평주의 박씨와 같이 자신을 도왔던 인물까지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족들이 숙청되자 반기를 들었고, 광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에 961년에 왕궁을 수리하여 영건하게 되면서 광종은 당숙인 왕육의 집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이궁은 공신숙청의 잡음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광종은 왕궁 증축을 계획했지만 호족들의 반발로 인해 왕육가로의 이어가 선택되었습니다. 그 후 964년에 왕육이 사절로 이어졌다가 환궁하면서 조서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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