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은 송악의 호족 출신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충청도를 점령하여 태봉의 세력을 넓혔으며,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국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의 우수한 전략과 능력으로 나주와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국력을 증진시켰습니다. 궁예의 총애를 받아 시중에 올라가고, 궁예의 독단과 전황을 문제 삼아 궁예를 축출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후에는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견훤을 격파하고 국내 안정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정책적으로도 발해 유민을 수용하고 북진 정책을 펼쳤으며, 호족 가문과의 결혼정책, 유학정책 등을 통해 국가를 통합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처럼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전략은 고려의 건국과 번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 고려건국
918년, 왕건은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김락, 염상, 견권 등의 지원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받았습니다. 이에 918년 음력 6월 15일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나라의 국호를 '고려'로 하고, 새로운 연호로 '천수(天授)'를 정하였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919년, 왕건은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松嶽)으로 수도를 이전하여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통일 역량을 키우기 위해 궁예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흑창을 설치하고 세금을 낮추어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호족 세력과의 융합을 통한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여 정권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했습니다. 또한 북진 정책과 숭불정책을 내세워 안정한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개성보다 더 정성을 기울여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하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전라도 세력과 우호적인 정책을 펴 전라도를 정복하려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패배를 거듭했지만, 이후 고창 전투를 통해 승리를 거두어 승리의 기세를 잡았습니다. 이를 통해 왕건은 고려의 통일과 국력 강화에 크게 기여한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습니다.
2. 반란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반란으로부터 살아남았다. 반란을 일으킨 환선길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로, 아내의 제안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계획했다. 그러나 역모 계획은 발각되었고, 왕건은 증거 부족으로 무마시켰다. 환선길은 내전에 침입하여 왕건을 겨누었지만 왕건의 침착한 태도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 그 후 환선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와 별개로 청주 출신들도 반란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처형 여부를 놓고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왕건은 염상의 건의를 따라 모두 처형했다.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고려의 안정과 통치를 견고히 하였다.
3. 신라와의 관계
신라는 왕건에게 호의를 보었습니다. 이는 왕건이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신라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몰락의 위기에 처한 신라는 왕건을 신뢰할 수 있는 호족 출신으로 판단하였고, 이는 신라의 장군 출신이었던 견훤보다 왕건을 믿음직한 지도자로 보게 한 요인이었습니다. 경애왕이 견훤이 살해된 후에는 신라는 고려에게 의존하였고, 왕건은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927년 9월에는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가 시작되자 신라는 왕건을 지지했습니다.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왕건을 지원할 의지를 밝혔습니다.
4. 후백제와의 관계
태조 왕건은 926년에 발해의 유민들을 흡수하고 후백제와 신라를 협공하여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경주를 공략하고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임으로써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927년에는 견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여 대북부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했지만, 견훤의 기습으로 경주가 함락되었습니다. 이에 태조는 후퇴하면서 많은 병력을 잃게 되었고, 신숭겸과 함께 공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위험에 처한 태조는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가게 됩니다. 신숭겸은 왕건의 역할을 하면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는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지만, 930년의 고창 전투를 통해 후백제를 격파하고 한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5. 고창전투와 후백제몰락
고창 전투는 고려의 대승으로 끝나 견훤이 패배함으로써 후백제의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는 김선평, 권행, 장길 등 유력 호족들의 참전과 유금필의 적극적인 공격에 힘입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호족들의 활약이 과장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들은 전투 동안 관망을 하다가 승기가 고려에게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출전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창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하고 그의 지원을 받은 데 있었습니다. 이후 고창 전투로 인해 견훤은 경상도 일대의 통치력을 상실하고 삼한 전체의 패권도 빠르게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과 동해안 지역의 호족들, 그리고 후백제의 신하였던 매곡성 성주 공직이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신라 역시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여 호족들의 투항을 유도했고, 고려와의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고창 전투 이후에는 후백제가 패전을 보완하기 위해 해군을 동원하여 고려 본토를 침략하려 시도했지만, 고려 해군의 성장과 유금필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실패했습니다. 실제로 후백제의 해군이 고려 본토를 침공한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고려 해군은 후백제의 해군을 격파하고 본토의 내해와 섬들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고창 전투는 고려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태조는 호족들의 투항을 유도하고 고려의 권력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6. 후삼국 통일
933년에는 후백제의 군대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근처까지 진군하여 경주를 공략하면서 신라가 멸망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왕건은 긴급히 유금필을 출동시켜 후백제군을 격파했습니다. 후백제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고, 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습니다. 이후 유금필은 신검의 군대에 대항하여 재탈환한 지역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934년에는 왕건이 운주를 빼앗으려고 진군하고 있던 소식을 듣고 신검이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운주로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의 기세가 강해 패배할 것을 우려한 견훤은 화친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왕건은 이를 거절하고 유금필을 투입하여 후백제군을 대파시켰습니다. 이후 유금필은 나주를 재탈환하고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후백제의 영토를 뺏어왔습니다.이로써 고려는 후백제를 완전히 제압하였고, 견훤과 그의 아들들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후삼국이 완전히 통일되었습니다.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하고 융화 정책을 시행하여 후백제와 신라의 귀족을 대접하였으며, 불교를 국교로 삼아 보호하고 사원을 세워 승려를 우대했습니다. 이와 함께 신라 문화를 존중하고 왕권을 확립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후 왕건은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펼치면서 후백제의 저항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7. 말년
태조는 943년 임종을 앞두고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훈요 10조를 유포하여 후세의 왕들에게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태자 무의 앞날을 걱정하여 박술희를 고명 대신으로 정하였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울음 소리를 듣자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붕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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