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태어난 첫 번째 군주로, 청년 군주로서 무난한 정치를 펼치며 안정화시키고 전시과를 실시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1. 즉위 이전
경종은 광종의 호족 숙청 정책으로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광종은 태자를 어릴 때부터 항상 의심하고 경계하여 태자에 대한 야단을 쳤는데, 이는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경종은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광종이 경종을 유일한 아들로서 숙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경종이 아버지 광종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발생한 상황입니다. 대목왕후는 광종이 시행한 노비안검법에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목왕후가 자신의 친정인 황주 황보씨를 비롯한 호족 세력들의 대변자로서 활동했음을 시사합니다. 대목왕후의 반대로 인해 경종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면서 궁궐 안에서 자랐습니다. 이는 경종이 호족 세력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자랐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경종이 총명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후회와 과실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경종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왕위를 안정적으로 계승했음을 나타냅니다. 경종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궁궐 안의 정세를 안정화시키고, 정종과 광종의 대숙청 기간을 이겨내며 후계자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습니다.
2. 즉위 후
975년, 경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이전 선황이 피를 많이 흘렸으며, 경종 자신 또한 위협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가 혼란 상태에 놓여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을 보면서 원한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경종은 이러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우선적으로 펼쳤습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채용하고,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며 효자 표창도 많이 했습니다. 이로써 경종은 광종 시대의 공포 정치 분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적인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경종이 왕선이 건의한 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사악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경종이 이 법안을 승인했는지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명확한 해석이 없습니다. 경종은 효도를 강조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이 법을 옳다고 판단하고 승인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소멸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왕선과 호족 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경종의 삼촌들도 이 법에 연루되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최승로는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치면서 경종과 왕선에 대해서만은 관용을 베풀어주었다면 왕실의 노릇을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으로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복수법의 폐단을 인식한 경종은 입안자인 왕선을 파면하고 지방으로 추방했습니다. 또한, 경종은 집정(재상)을 좌집정과 우집정으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키고 서로 견제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이어지는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이름만 바뀌어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경종은 사적인 복수를 행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고 복수법을 폐지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성종 시대에 쓰여진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경종은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키는 등 합리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광종 시대에 자리잡은 인재를 선발하여 안정적인 정치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소홀히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광종 시대의 공포 정치와 호족들 간의 정쟁, 그리고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경종이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3. 말년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 하고 오락과 음탕한 생활에 빠져 지냈다. 980년 최지몽이 왕승의 모반을 예언하여 이를 믿고, 모반을 막고자 왕승 등을 처형하였다. 981년 7월 병세가 위독해지자 장남인 개령군 왕송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어린 아들을 세우면 왕위가 찬탈당할 것을 우려하여 사촌동생이며 매제이자 처남인 개령군 왕치에게 양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 향년 27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한 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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