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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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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26편 고종 조선의26대 국왕인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살아 있을 땐 실록이 쓰이지 않다가 순종까지 승하한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쓰였습니다. 실록이라는 이름은 붙였지만 일제에 의해 누락과 왜곡이 심하다고 평가됩니다하지만 이미 근현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실록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여기서부턴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역사적 기록으로 쓰여집니다. 이제 고종의 생애업적평가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1. 즉위 정조의 증손자 헌종이 후손없이 돌아가자 방계가문인 철종으로 보위가 이어졌으나, 1863년에 철종이 후계없이 세상을 떠나시며 왕위 계승권은 익평군과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에 빚어졌습니다. 흥선군은 익종의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동의를 얻었고, 그의 아들 재황은 익성군의 군..
조선역사 25편 철종 조선의 제25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인 철종(哲宗)은 장황제(章皇帝)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경험으로 유명한데, 이로 인해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국왕이 되기 전까지는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차기 군주로 옹립되었습니다. 정치적 감각 부족으로 제대로 된 정치를 이끌지 못했으며, 마지막 임금으로서 종신하여 왕좌를 이어받는 자손 없이 요절한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기도 합니다. 목차 1. 철종의 생애 2. 유배생활 3. 즉위 4. 섭정과 친정 5. 임술농민봉기 6. 말년 1. 철종의 생애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원범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는 변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
조선역사 24편 현종 생애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헌종대왕행장》에따르면태몽은이례적으로비범한출생을가졌습니다.출생일에는학들이날아와왕비의품에들어가는기이한사건이일어났는데,궁궐내에서는이를기이하다고여겼습니다.또한,그의외모는매우준수하며목소리는크고금석과같다고합니다.놀라운점은100일전에도벌떡일어섰다는것입니다. 헌종은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동궁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뒤 할아버지인 순조의 사망으로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할머니이자 순조의 정비인 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습니다. 수렴청정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1839년(헌종 5년)의 기해박해 때에는 프랑스 주교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조선역사 23편 순조 어진 일제 강점기 당시 순조의 어진은 총 4 채가 있었으나, 1954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순조 어진 또한 다른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화재로 손상을 입었는데,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은 결과로 손상이 더해졌습니다. 어진들은 상당 부분이 돌돌 말려진 상태에서 화마에 휩싸였으며, 특히 얼굴을 포함하여 반 이상이 타버리는 바람에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즉위 1800년, 순조는 당대 최연소로 즉위하여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순조는 세자 시절을 상대적으로 짧게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서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자 책봉조차도 정조의 건강 악화로 인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세자로 책봉된지 4..
조선역사 22편 정조 세손기간 동복형 의소세손이 2살에 요절한 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실질적 장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조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영조는 정조가 의소세손의 상중에 태어났다고 처음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어린 나이에도 그 까다로운 영조조차 만족시킬 만큼의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정조의 재능을 하루가 멀다 하고 자랑했으며 300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도다라는 몹시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에 이르른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조선역사 21편 영조 왕세제 시절 1721년, 경종이 즉위한 후, 이복 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여 후사를 도모하라는 노론의 제안으로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그 후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건의 했지만 이러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 세력은 경종의 반역과 불충 의혹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대신과 50여명의 고관들은 사형당하거나 유배, 투옥되는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연잉군은 이에 따라 큰 지지 세력을 잃게 되었고, 박상검과 문유도의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도 받았습니다. 이에 소론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경종은 건강이 약해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노론과 완론파 소론은 여전히 연잉군을 지지했고, 경종비선의 왕후는 후사를 삼아보려했으나 논란이..
조선역사 20편 경종 금지옥엽 후궁 출신인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숙종은 아버지에게 귀한 아들이었으며,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희빈 장씨의 배경으로 인해 권력과 총애를 누렸습니다. 희빈이 중전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그의 지위는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의 정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제압하고 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어머니가 후궁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면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대우했습니다. 어머니 희빈의 사건으로 인해 숙종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머니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그의 부탁은 무시되었습니다. 이후 윤증의 추탈로 인해 상황은 악화되었고, 경종 또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경종의 병세를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리..
조선역사 19편 숙종 왕권 강화 숙종은 조선 왕실에서 특별한 정통성을 가진 왕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효종의 외아들인 현종과 정실 부인인 명성왕후 소생으로, 어머니의 세습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것은 분명한 정통성을 갖춘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외척과 관련된 문제가 없었으며, 그의 이름인 '광'은 양광(楊廣)과 같은 음으로 이에 대한 우려를 피하기 위해 '순'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숙종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친정에 나서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그의 왕위에 대한 자신감과 권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숙종의 부계와 모계는 모두 완벽한 정통성을 갖췄으며, 가족들의 지원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통성과 가족의 지지로 인해, 숙종은 왕위에서 ..
조선역사 18편 현종 생애 효종의 외아들이자 숙종의 아버지로서,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심양에서 인질로 있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이는 조선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경우이기도 합니다.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왕세손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한 후에는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왕실에서는 드물게 발생한 세손-세자-왕의 순서를 정상적으로 밟은 극소수의 경우 중 하나입니다. 예송논쟁 현종시대에는상복문제를두고서인과남인사이에두차례의예송이벌어졌습니다.이는국왕의정통성과도밀접한문제로,이러한정쟁은더욱격화되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은 1659년현종원년,효종이승하하자효종의계모인자의대비(장렬왕후)의복제문제를두고서인과남인사이에갈등이일어났습니다.두세력은계모가아들의상중에상복을얼마동안입어야하는지에대해각각다른의견을내며대립했습니다..
조선역사 17편 효종 즉위 효종은 광해군 11년에 조선 능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인조의 친어머니인 인열왕후 한씨이고, 새어머니는 장렬왕후 조씨였습니다. 그의 비는 우의정장 유의 딸이자 인선왕후 장씨였습니다. 효종은 어린 나이에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가는 등 병자호란의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로 간 형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볼모로 가겠다고 할 정도로 형제 사이의 우애를 지켜나갔습니다. 인조의 승하 이후 효종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후에는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즉위 후에는 친청파와 반청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때의 일로 인해 친청파인 김자점은 신임을 잃고 처형당했으며, 이후에는 친청파가 숨어들고 반청파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효종은 북벌론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