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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역사

고려 역사 2편 혜종

혜종 순릉
혜종 순릉

고려 제2대 대왕 혜종은 뛰어난 군사력과 용맹함으로 유명한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시해하려는 침입자들을 맨손으로 무력화시킨 일화로 유명합니다. 그는 왕건과 함께 후삼국 통일을 위해 전쟁터를 누비며 무공을 세웠으며, 그의 위상은 태조에 버금가는 바가 있었습니다. 성품은 호방하고 관대하면서도 지적인 능력을 갖췄으나, 암살 시도로 인해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조울증 증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0. 탄생설화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기록된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의 어머니인 오씨가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초가 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어머니 오씨를 만나게 되는데,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는 도중 뒤를 보니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왕건은 이를 보고 오씨에게 반하게 되었고, 그날 밤 오씨와 동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씨를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 왕건은 돗자리 위에 질외사정을 했는데 오씨부인이 정액을 쓸어 모은 뒤 오씨의 질에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오씨가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혜종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혜종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1. 즉위 전

혜종은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최후 전투인 일리천 대전에서도 용맹을 발휘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왕건의 장남으로서 정통성 면에서는 불가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혜종의 외가인 나주 오씨는 다른 처가들보다는 세력이 미약하여 혜종이 항상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혜종의 외가는 나주에서 꽤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안으로, 왕건의 상륙 작전 때부터 호족들을 대표해 내응한 바가 있었으며, 유천궁과 같은 대호족이 내심 반대했을 텐데도 딸을 왕건의 부인으로 보낼 정도의 권력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삼국 통일 후 서남해 호족들은 왕건의 작전으로 인해 권력을 상실하고,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수복한 이후에도 서남해 호족들은 권력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나주의 공략을 둘러싸서는 서남해 호족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으며, 견훤의 고려 망명도 나주 호족들의 지하 공작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주의 수복과 견훤의 고려 망명은 서남해 호족들이 다시 권력을 회복하고 힘을 보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고려 조정에서 체면을 구기고 힘을 회복하게 된 서남해 호족들의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2. 즉위

혜종은 즉위 초기에는 박술희의 도움을 받았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으로는 강했지만 정치적인 실세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해 혜종을 보호하지 못했고, 혜종은 왕규(정종)에 의해 피살당했습니다. 왕규는 혜종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여러 번 그의 딸을 혜종에게 시집보내는 등 왕건의 결정을 따라갔습니다. 이로 인해 혜종은 아버지인 왕건의 실책으로 큰 피해를 겪었습니다. 왕건은 혜종을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선정하지 않았으며,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결혼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는 경순왕과 결혼한 낙랑공주의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왕건이 후견인을 설정할 수 있는 여러 호족 세력 중 박술희만을 선택한 것은 혜종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반도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왕건의 29번의 결혼은 혜종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낮추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혜종의 용맹함을 믿고 혜종이 충성하는 동생인 왕요를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로 인해 왕무와 왕요의 부인들이 서로 자매지간이었고, 이는 왕건이 혜종과의 분쟁을 막기 위한 비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왕건이 혜종에게 아주 손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붕어가 다리를 놓을 직전에 재상으로 임명된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일에 대해 혜종과 함께 처결하고 보고하도록 명령한 것은 왕건의 의도에 따라 임명된 고명대신들이었다면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3. 왕규의 난

왕규는 고려 초기 광주의 대호족 출신으로, 개국 공신으로서 왕씨 성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으며, 그 중 하나가 아들을 낳아 광주원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규는 혜종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혜종은 이를 직감하여 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과 자신의 맏딸을 결혼시켰고, 왕규가 음모를 꾸미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혜종이 몸이 편치 않아 신덕전으로 옮겨져 있을 때, 왕규는 밤에 심복들과 함께 혜종을 공격하려 했지만, 최지몽은 이를 눈치채고 몰래 중광전으로 옮겨 화를 피했다. 그해(945년) 혜종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가 왕위에 오르며 정종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려다 실패했기 때문에 혜종의 동생이 왕에 즉위하자 반란을 일으키게 됐지만, 정종은 왕규의 동향을 알고 있었고 혜종의 병세가 위독해질 때부터 서경의 수비대장 왕식렴과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왕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왕식렴은 군대를 이끌고 개성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했고, 왕규는 감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곶에 귀양 보냈다가 사후에 처형하고 그의 세력 3백여 명을 처형했습니다.

4. 말년

945년 10월 23일, 고려 본궐의 편전 중광전에서 사망한 혜종은 공인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복동생인 왕요가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혜종의 아들인 흥화군은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딸인 경화궁부인은 광종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른 자식들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며, 경화궁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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