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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17편 효종

효종 실록

즉위

효종은 광해군 11년에 조선 능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인조의 친어머니인 인열왕후 한씨이고, 새어머니는 장렬왕후 조씨였습니다. 그의 비는 우의정장 유의 딸이자 인선왕후 장씨였습니다. 효종은 어린 나이에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가는 등 병자호란의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로 간 형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볼모로 가겠다고 할 정도로 형제 사이의 우애를 지켜나갔습니다. 인조의 승하 이후 효종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후에는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즉위 후에는 친청파와 반청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병자호란 때의 일로 인해 친청파인 김자점은 신임을 잃고 처형당했으며, 이후에는 친청파가 숨어들고 반청파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효종은 북벌론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시헌력을 반포하여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청나라의 문물을 높게 평가하고 그를 숭상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소현세자가 즉위했다면 근대화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의 기술과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효종과 크게 다른 결과를 이루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대응을 통해 조선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통성

효종은 조선시대에 있어서 정통성 문제를 민감하게 다루며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범적인 지도자로 평가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인 결단은 종종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효종은 군비를 강화하고 신인을 발탁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소현세자 가족을 보호하면서도 역적을 엄중히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특히, 효종은 강빈과 소현세자 가족에게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강빈은 정통성 문제로 효종의 치세에 대놓고 역적으로 취급당하고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강빈과의 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강빈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그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효종의 모순적인 태도는 당대에도 비판을 받았으며, 사후에도 예송논쟁 등의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효종의 정통성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건들은 효종의 왕위가 불안정하다는 인식을 키우는 한편, 조선시대 정치에서 정통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북벌과 군비 확장

송시열은 일반적으로 북벌의 주요 추진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실제로는 북벌에 대해 소극적이었습니다. 효종이 북벌의 당위성을 제시할 때도 송시열은 주로 수신(修身)만을 권할 뿐이었습니다. 송시열이 북벌파였다는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북벌에 별로 열성적이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송시열은 북벌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효종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즉, 효종은 송시열을 통해 서인 세력을 등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송시열 또한 자신의 산당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산당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재야 세력들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효종은 산당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또한 효종 본인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점도 있었습니다. 그는 형 소현세자의 자식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챈 '찬탈자'로 여겨지기도 했고, 특히 형수 세자빈 강씨의 출신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효종은 이러한 의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신하들이 강씨 출신을 논할 경우 엄격한 처벌을 가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효종은 송시열과의 협력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는 재야 세력들의 반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북벌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북벌이 조선의 군사력을 높이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왕권의 미약한 지원도 있었습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그 가족에게 애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를 드러내면 왕위의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효종은 형수인 강씨에게는 강경하게 대응해야 했습니다. 봉림대군 시절부터 소현세자와의 관계는 매우 좋았으며, 이후에도 소현세자의 자손들에게 귀양을 옮겨주고 한양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려를 드러내는 것은 효종의 왕위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또한 효종은 북벌을 추진함으로써 군비 확장과 대동법의 확대 등을 통해 조선의 안정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이완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과 군사 훈련의 강화를 추진했습니다.그러나 북벌이 결국 효종의 사망으로 끝나게 되었고, 나선정벌 당시에는 효종이 지휘한 조선군이 전리품으로 얻은 플린트락 머스킷을 수백 정만 소수 생산한 후 백지화하는 등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조총보에 비해 생산이 어렵고 성능도 조총보에 비해 떨어져 비용 대비 효과가 미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말년

효종은 얼굴에 종기가 생겼을 때, 치료를 위해 의사들 사이에서 치료 방법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 가운데 신가귀라는 한의사는 침을 놓아서 피를 빼내고 독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효종은 신가귀의 의견을 따르고 침을 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침을 놓은 후, 효종의 혈관이 손상되고 과다출혈이 발생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처음에는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했으나, 결국 과다출혈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효종의 생명을 담당했던 의료진의 실수로 인한 불행한 사건으로 기억되었습니다. 효종의 사망으로 인해 신가귀는 교수형으로 처벌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산당 독살설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현종은 산당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이는 효종의 치료를 책임졌던 의료진의 의료사고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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