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역사

조선역사 14편 선조

조선 제 14대왕 선조
선조

생애 하성군

1565년 11월 11일, 한성의 인달방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3남으로 태어난 선조는 하동부대부인의 증손녀와 중종의 아들로, 하성군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선조는 어린 시절에 덕흥대원군이었을 때 중종으로부터 집을 바꿔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뒤, 좋지 않은 땅에 건물을 짓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이곳에서 왕으로 즉위할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선조는 명종의 지시로서 백부인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명종은 조카들에게 많은 정을 베풀었습니다. 명종은 하성군을 특별히 애처롭게 여기며 하원군과 하릉군과 함께 성년이 되어도 훈육을 계속했습니다. 하성군이 간택된 이유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명종의 애정과 선조의 능력을 고려하면 합당한 선택이었습니다. 1567년에는 명종이 죽기 직전에 선조를 후계자로 정하고, 선조는 인순왕후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덕수궁에서 즉위한 선조는 조선 최초로서 자출신의 왕으로, 적자를 낳은 대군이 아닌 왕이 되었습니다.

즉위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고, 선조 자신은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선조의 경우는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예종의 조카이긴 했지만,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이미 후계자가 지명되어 있었고, 그의 왕위는 이미 비어있던 자리를 채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 한 해 만에 끝이 났습니다. 이 때에는 낭비를 줄이고 사림파를 끌어들여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또한 지난 폐정의 잔재를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569년에는 송영종의 사례를 들어 아버지인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하고자 했지만, 이에 대한 반대로 인해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는 선조의 아버지가 법적으로는 그저 종친의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선조는 아직 제대로된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은 채 즉위했기 때문에, 개혁을 추진하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왕조가 겪은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던 선조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명종의 후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선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선조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힘써야 했습니다.

임진왜란

1592년의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 간의 충돌으로 시작되었으며, 조선이 수많은 희생을 친 전쟁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육상전에 주력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축성과 실제 전쟁 대비에 역점이 두어졌으나,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조선은 전면 패주를 면치 못했습니다. 선조는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믿었던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맡기고 싸움을 격퇴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로 참패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한양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일부 권한을 광해군에게 위임하여 몽진길을 통해 의주목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행동은 궁궐의 방화와 백성들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선조는 한양을 떠나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백성들이 분노하고, 종묘사직과 왕실을 맡겨놓고 자신만 몽진을 결정하려 한 점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조의 몽진은 조선의 위기를 야기하였으며, 이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을 가차없이 숙청하고, 그의 후임으로 원균을 지명하였으나 이는 큰 실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선정된 원균의 무능력한 지휘로 인해 조선 수군은 대패하게 되었고, 선조는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선조의 평판은 크게 훼손되었고, 조선은 엄청난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발생한 이몽학의 난과 같은 사건으로 이어지며, 조선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후계

임진왜란 발발 후 평안북도 의주까지 몽진하는 도중에 선조는 광해군을 영변부에서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장남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취미삼아 백성을 살해할 정도로 인성이 좋지 못해 백성들에 인식이 나빠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세자에게 분조를 맡긴 후에도 선조는 자신이 왕위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고, 광해군을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임진왜란 중에도 양위 소동이 잦아지게 되었으나 선조는 생전 양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양위 소동을 선조에게 상소하여 귀양보내지만, 선조는 이를 통해 세자의 지위를 흔들어가는 것이 권력 유지를 위한 쇼임을 직접 인정합니다. 음모론 중에는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는 헛소리로 여겨졌고 허준까지도 살해범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선조는 때때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바꿔볼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고 결국 광해군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교지를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류영경이 이를 빼돌려 적발되면서 이 사건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여진 정벌

선조대 시기는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이 잦아지면서 여진 정벌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주로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을 타겟으로 하였습니다. 특히 1583년에는 경원부의 니탕개 등이 2~3만 명의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를 함락시키는 난을 일으켰고, 조정은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선조는 이에 강력히 대응했습니다.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여진족의 소굴을 무자비하게 정벌하였습니다. 녹둔도를 습격한 여진족에 대해서도 선조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벌하고 수급을 베고 산채를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의 저항은 여전했고, 임진왜란 이후 누르하치와 홀라온의 통일 전쟁으로 여진족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은 여진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고, 번호들이 누르하치에 흡수되어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상황이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더 이상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선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역사 16편 인조  (0) 2024.03.19
조선역사 15편 광해군  (0) 2024.03.18
조선역사 12편 인종  (0) 2024.03.18
조선역사 13편 명종  (0) 2024.03.17
조선역사 11편 중종  (0) 202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