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인조의 생애는 1595년(선조 28년), 황해도의 해주목에 태어난 능양군 인조는 선조의 손자로 태어났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해주로 피난을 갔을 때, 연주군부인 구씨가 인조를 출산했습니다. 인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행장의 특유한 과장으로 보입니다. 선조는 인조를 아끼며 직접 휘와 자를 지어주었고, 광해군은 이에 반대했으나 이는 행장의 과장으로 보입니다. 선조는 인조를 알현할 때마다 재롱을 떨며 기쁘게 했습니다. 선조 때 능양군으로 봉해진 인조는 할머니 인빈 김씨의 지원으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의심병으로 옥사가 빈번히 발생했고, 이에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정원군은 옥사를 일으킬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공안정국은 이들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반정의 명분과 준비
광해군은 사건을 조작하여 슬쩍 물러나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능창군을 비참한 신세로 만든 후 약과의원을 보냈고, 자살을 병사로 보고 한 지방 관들을 처분했습니다. 이때의 부산은 근거 없는 고변을 믿고 만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평범한 왕족 능양군을 비롯하여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등이 광해군에게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인조는 중종과는 달리 엄연한 반정을 주도했으며, 이에 대한 인조의 입장은 명확했습니다.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미신으로 능창군을 죽이고 정원군의 집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화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은 전후사정을 고려할 때 모순되는 점이 많습니다. 인조는 신경진, 구굉과 함께 반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역으로 평가되며, 반란 세력들도 인조의 정권을 인정했습니다. 광해군의 폐위에는 명분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은 아닙니다. 폐모살제와 영건 사업으로 인한 민생 파탄은 현대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인조의 반정 명분이 부족해서 광해군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 자체가 왕족을 죽이는 것이라는 조선의 원칙과 관습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광해군은 건강해야 했고, 인조 즉위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도 광해군은 살아있어야 했습니다.
명나라의 책봉 문제
명나라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이 충순한데 왜 폐위시켰느냐고 반발했습니다. 책봉을 받으러간 조선 사신들은 산동에서 등주 자사에게 욕을 먹고, 베이징 도착 후에도 불리한 눈초리를 받았으며, 명황제는 조선 왕을 시해한 것으로 소문되어 해명에 고생했습니다. 인조 정권은 명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썼고, 이 과정에서 모문룡의 도움을 받았으나 완전한 도움은 아니었습니다. 인조가 명에 쓴 뇌물은 이전에 명에 쓴 은의 양을 능가했고, 모문룡의 도움은 인조 정권의 약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즉위 3년째에 명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을 받았습니다. 광해군 이후 금과 친하게 지내며 친명배금 정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폐위해야 한다는 논리를 명나라가 깨버렸습니다.
이괄의 난
인조 정권은 초창부터 불안했으며, 북인 처벌은 엄격했습니다. 북인 중에서도 권력이 강했던 이이첨과 유몽인 등은 가차 없이 처형되었고, 대북과 소북에 대한 숙청도 집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습니다. 이렇게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공주목의 공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이괄을 흥안군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괄의 반란은 실패하고, 그 후에도 이괄의 부하들이 청군에 투항하여 조선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인조의 허술한 숙청은 북방 군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핵심 인력들을 반란군과 청으로 이탈시켜 조선을 공격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조는 피신한 공산성에서 공주에 머무며 국가의 안정을 위해 힘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공주의 인재를 뽑고, 수관과 군사의 품계를 올려주었습니다. 또한 인조가 머물렀던 곳에는 쌍수정이라는 누정이 세워졌고, 인조를 기념하는 비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조는 공산성에서의 피신을 통해 조선의 안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정묘호란
서인 정권은 일반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반정 공신들은 주화론자였습니다. 광해군 시절의 북인들은 주화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대부분이 현실적인 세력으로서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습니다. 이를 위해 광해군대의 외교 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친명배금 정책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애초에 반정을 일으킨 주요 서인 멤버들은 대부분 주화파였습니다. 이들은 현실적인 세력으로서 외교적 방법을 고려했으며, 실질적인 외교적 성과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친명 배금 정책을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광해군 대의 외교적 방법을 계승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명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건 후금은, 인조 정권이 반명을 일으킨 것에 대해 보복을 가하기 위해 한성으로 진격해갔습니다.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서북 지역의 군사력 등으로 인해 계획된 군사 전략을 실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인조 정권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국교 단절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후금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자 했으나, 정묘호란은 결국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 8년 뒤, 즉 인조 13년(1635)에 인열왕후 한씨가 승하했습니다. 후금은 이에 대한 조문단을 보내고, 동시에 홍타이지를 존호에 동참하자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이는 표면상으로는 형제국 간의 의논을 권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후금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하는 압박이었습니다. 후금의 사절단은 조선의 호위로부터 위협을 느끼고도 주를 시도했고, 이로인해 화친 정책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형제 관계보다는 명의 조공국으로서의 군신 관계가 더 중요했습니다. 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는 유교적 신념이 국내에서 강했기 때문에 후금이 명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또한 청이 조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병자호란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태종 홍타이지는 4월 11일에 국호를 다이칭(大淸)으로,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변경했습니다. 이에 조선의 사신들은 황제의 나라가 아닌 형제의 나라라며 배례를 거부했고, 국서를 버리고 국서를 통원보에 옮겨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국의 국서 교환은 끊어졌습니다. 결국 병자호란은 1637년(인조 15년)에는 청군이 압록강을 도해하여 조선을 공격하면서 일어 났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버렸고, 각지의 근왕군들은 청군에게 각각 격파되거나 흩어지는 등의 역전을 겪었습니다. 이는 인조가 잘못된 사령관을 임명한 것과 함께, 조선군이 집단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된 결과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명분을 강조하는 대명의리를 반정의 한계로 두는 등, 인조 정권의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남한산성에서의 병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47일 동안 농성했습니다. 하지만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전멸당하면서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김류와 최명길 등은 결국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주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삼궤구고 두례를 받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는 신하들에게 더욱 굴욕적인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청에 잡혀가고, 인조는 청에 대한 굴욕을 후세에 남기도록 비를 세우도록 지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삼전도비'가 세워졌는데, 이 비는 조선이 침략당한 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조선의 수치와 수난을 상징하는 표시로 남았습니다. 이 비석은 현대까지도 조선의 수치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남아 있습니다.
말년
병자호란의 패배는 인조의 무능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군이 겪은 여러 혼란스러운 사건들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일가를 풍비박산 낸 것은 정말로 비정한 일로 여겨 집니다.소현세자가 귀국 후 의료사고로 사망한 뒤, 인조는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종법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설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원손의 나이와 무술연마 능력 등을 들어 설득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조는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할 때 이를 거부하고,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운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대했던 신하들을 물리치고 결국 봉림대군이 다음 세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 김류와 김자점은 인조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특히 김자점은 처음부터 인조의 계획에 협조했습니다. 김류는 인조의 의도를 짐작하고 행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인조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강빈 사사만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김자점은 인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활용된 인물로, 인조가 나이가 많아서 원손의 성장을 관찰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습니다. 이에 김육은 원손의 재능을 인정하며 반대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결국 원손의 승계를 결정했습니다. 결국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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