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시절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은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뛰어나고 용감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선조가 광해군을 임시 책봉하여 군사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광해군이 조선의 실권을 모두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광해군은 전면전에서 활약하며 전쟁터를 누빈 유일한 왕자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선조는 국외로 망명하려 했을 때도 광해군은 왕실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해 왕실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광해군의 활약으로 인해 자신의 권위가 약화되고 광해군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차례 광해군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 광해군을 대체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를 제약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조선을 지키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왕실과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용감한 행동과 지도력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낸 중요한 요소로 평가되었습니다.
국왕 시절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후계 문제를 미루다가 임박한 죽음 앞에서 세자를 왕위에 올리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보살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영창대군의 옹립을 원한 류영경은 이 명령을 감추어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했습니다. 이에 인목왕후가 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를 인정하여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광해군과 대북 세력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후 발각된 역모 모의 사건들은 대부분이 과장되었지만,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일부 사건들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조의 돌연사로 인해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허준과 광해군의 관계는 호의적이었습니다. 허준은 광해군을 치료하여 그에게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제압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대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 싸움에 빠져있는 시기였으며, 음모론은 그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추측으로 여겨집니다. 현재에는 허준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음모론은 대부분이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추측으로 여겨집니다.
붕당
대북 세력인 기자헌과 이이첨을 중심으로 균형이 무너지고 대북이 역대급으로 패악을 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북의 막장화로 인해 광해군은 대북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허균은 폐모론을 선동하고 인목왕후까지 살해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에 허균은 처형되어 폐모론으로 요동친 민심을 무마하였으나, 대북에 의한 왕권 잠식은 계속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정국을 이끌 능력이 부족해 대북 독재의 길을 열었고, 이는 조선의 내정 피폐화와 북인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선조는 붕당을 제어하고 정무적 능력을 발휘하여 동서인들을 적절히 이간질하고 중재함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옥사와 폐모론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으나 이미 늦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대북 세력들에게 원한을 품어 잠재적 불만론자가 되었고, 대북파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광해군은 권력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이로 인해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봉산옥사
광해군 4년(1612년) 2월 13일에 김제세를 시작으로 역모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황해도 봉산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다양한 사람들을 연루시켜 심문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고, 실록의 사관평에서는 이 사건이 신율이 꾸민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신율은 자기의 원수를 숙청하려고 하다가 역모를 꾸미고, 많은 사람들을 연루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문이 멸망하게 되었고, 광해군은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9월에 끝나게 되었지만, 그 피해는 상당했습니다.
계축옥사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명분 중 하나는 폐모살제, 즉 친족에 대한 무자비한 견제였습니다. 이에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을 독살하고,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로 보내어 사실상 목숨을 빼앗았으며,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직접 이들을 죽이도록 교사했다는 사료는 전무하며, 이들에 대한 처벌도 따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는 광해군이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의심을 낳았습니다.또한 임해군의 경우 가족과 노비까지 혹독하게 수사하여 몰아붙였으며, 처음에는 병사로 보고했으나 후에 재조사에서는 노비가 독약을 올렸다가 임해군이 먹지 않아 목을 매어 죽였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해당 대상은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영창대군을 감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역모에 휘말린 김제남은 사사되었으나 그의 저주에 관한 사건은 의심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어미인 공빈 김씨를 저주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이를 임해군이 노비들을 동원해 막아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건들은 광해군과 인조반정 세력 사이의 의혹과 갈등을 야기하였습니다.
중립 외교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누르하치의 요좌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이 원병을 지시했고, 계료총독 왕가수는 수만 명의 병력을 징발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발송했습니다.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후금과의 적대 관계를 우려했으며, 이에 따른 후금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이 큰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조선은 군사적 공조를 최대한 피하고자 했으며, 광해군은 만력제의 성지가 없이는 출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비변사는 만력제에 출병을 권고했고, 광해군은 이에 수긍하면서도 칙서의 부재를 내세웠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요동아문의 분수는 염명태와 이여백의 자문이 공조를 다짐하며 조선군의 지원을 약속하였고, 광해군은 만력제의 복제에 따라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출병이 불가피해진 광해군은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보장하고 조선군을 명의 동로군에 속하도록 하여 출병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은폐하려 했습니다. 또한 후금과의 교역을 통해 녹봉을 지급하고, 군사적 공조를 위해 조선군의 출발을 명백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해군과 조선 사이의 긴장관계는 점차 해소되었고, 누르하치는 요서 공략에 집중하였습니다.
인조반정과 폐위
광해군은 재위 초반부터 후계자 선정을 번복하는 부왕 선조의 견제와 불안정한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명학파와 친교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후에 대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류희분이 소북의 실세였으며 서인과 남인 대북이 공존하는 체제였으나, 광해군의 옥사로 인해 대북 인물들에게 힘을 모아주게 되었습니다. 폐모론이 대두되어 대북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나고 중북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의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붕당의 균형은 깨지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끊임없는 옥사는 광해군의 불안감의 크기가 컸다는걸 보여준다. 이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다양한 당파들의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광해군은 대북을 키우면서 붕당의 균형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대북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광해군 자신조차도 불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기부터는 대북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이첨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서인이나 남인 등이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는 이이첨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반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에게 대대적인 처벌을 가했으며, 자신을 지지한 측근세력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의 반발로 인해 더 이상 북인을 키워주는 것이 어려워지고, 이는 반정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북인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이이첨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결국 반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귀와 김류 등을 비롯한 서인들의 반정 계획은 알려지고 발각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귀는 대질 심문을 주장하여 광해군의 의심을 거둘 수 있었으며, 이런 상황은 인조반정의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은 북인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반정으로 이어졌으며, 반정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 등이 대대적인 처벌을 받았고, 광해군 자신조차도 반정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광해군의 왕위 유지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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