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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12편 인종

조선 제 12대 국왕 인종
인종실록

세자 책봉

1515년 2월 25일, 조선 중종의 네 번째 아들이자 적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아들의 아명은 '억명(億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임신 중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 '억명으로 이름을 짓라'고 하자 장경왕후는 깨어나 벽에 '억명'이라는 글자를 써놓아 두었습니다. 이후 그 이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인종을 출산한 지 1주일 후인 3월 2일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장경왕후를 대신하여 친할머니인 정현왕후가 이 아들을 돌보았으며, 외숙부인 윤임을 위시한 대윤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작서의 변

이 사건의 배경은 중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박씨와 중종의 맏아들 복성군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과 왕위 계승에 대한 우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경빈 박씨는 중종의 가장 많은 애정을 받았으나, 그녀의 자식이 중종의 총애를 받던 중에 중종의 둘째 아들 원자가 태어났고, 장경왕후가 죽은 후에는 문정왕후가 새로운 왕비로 책봉되면서 경빈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중종의 관리인 정광필은 경빈 가문이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습니다.1527년, 중종의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인종의 생일 당일에 쥐의 시신이 그의 침실 밖에 매달려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여필이 이 사실을 알리고 이유청이 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이 사건은 궁인들의 비난과 경빈과 홍씨 등의 연루가 의심되었고, 중종은 경빈과 복성군을 강등하고 추방하는 처분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건의 주모자가 밝혀지면서 복성군은 복권되었고, 사건에 연루된 옹주들과 김인경은 신원되었습니다.

가작인두의 변

1533년에 저주 사건이 발생하여 경빈 박씨가 처벌되고, 이로 인해 복성군과 홍려가 연루되었습니다. 중종은 사사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복성군은 사형을 선고받고, 두 옹주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이 아들을 처벌한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혜순옹주의 남편은 유배되었고, 혜정옹주의 남편인 홍려는 고문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귀족 사이의 갈등과 왕실 내부 정치로 인한 파장을 초래했습니다.

화재사건

동궁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은 세자 인종이 불에 휩싸여 죽을 뻔한 사건으로, 이때 세자는 부모의 의지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갈등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대할지 결정했습니다. 불길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자리에 앉아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부모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효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중종이 나타나면서 세자는 자신의 행동이 부모에게는 효도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세간에서는 문정왕후와 세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과 갈등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중종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으나, 세자의 강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즉위와 사망

1544년 11월 15일에 아버지인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5일 후인 11월 20일에 창경궁명정전에서 인종인 다음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자하고 학문을 즐기는 성격으로 알려진 인종은 유학을 바탕으로 한선 한정치를 추구했습니다. 중종 때 좌절된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왕도) 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했으며, 사림들의 기대를 얻었습니다. 또한, 고안된 옛 규정을 되살려 사관이 자신을 기록하는 사초에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계모인 문정왕후의 압박으로 인해 고생도 많았습니다. 문정왕후가 인종을 항상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인종은 경원대군과 함께 문정왕후를 죽이라고 포악하게 부렸다는 사실도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정왕후를 극진히 우대하고 나이 차이가 거의 아들뻘인 이복동생인 경원대군과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1545년 6월 26일에는 인종의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하여 고열과 혼절로 고통받았습니다. 이에 6월 29일에는 국가 중대범죄를 저지른 자를 제외한 모든 잡범을 용서하고 사면한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이후 그는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선언하고자 했으나 결국 1545년 7월 1일에 경복궁 청연루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에는 독살설이 돌았습니다. 그의 계모인 문정왕후가 친절한 모습으로 오색떡을 권유했지만, 그날 쓰러져 승하했다는 것 하지만 이 독살설은 야사로 여겨져 거식증으로 사망한 것을 문정왕후를 비난하기 위한 소설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사에서는 음식과 약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보아 인종이 문정왕후와 윤원형, 윤원로에게 시달리며 미련 없이 삶을 마감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인종은 아버지 중종의 병에 마음을 쓰며 침식을 거부했고, 즉위 후에도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고 단식하며 업무에 몰두했습니다. 걱정하는 신하들의 권유를 무시하고 진료를 받지 않았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달 만에 사망했습니다. 신하들이 인종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유했지만, 문정왕후는 견제 때문에 고기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은 더욱 쇠약해졌으며 결국 1달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왕 실의 정치적인 관행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종은 죽기 직전에 조광조의 억울한 누명을 신원하고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명령을 내리고 승하했습니다. 이후에는 정식으로 신원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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