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1534년 음력 5월 22일에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종은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 인종의이복동생으로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 눈에 안질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종이 세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이후 중종이 급사하면서 인종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종이 왕이 된 이후, 문정왕후가 왕위에 개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양안 안질을 이유로 인종의 왕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언적 등 일부 인물들이 인종의 왕위를 지지하며 이러한 시도를 무효화시켰습니다. 이후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으로 자신의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명종 시대에는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이에 따라 백성들과 유학자들 사이에 반감이 증폭되었습니다. 특히,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의 부정부패는 사회적 불만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명한 도적 임꺽정의 활약도 두드러졌습니다. 명종 즉위 3년 전후로 소윤 일파의 대부분이 윤임에 의해 죽거나 숙청당했습니다. 이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윤들이 윤임의 명령에 따라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명종 시대의 권력 변화와 혼란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왕권강화 시도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된 명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량과 이정빈을기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왕의 믿음을 배반하고 횡령을 일삼았으며,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추방시켰다. 사림들의 반발에도 이들은 사화를 꾀했으나 1563년에 숙청당했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영향 아래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채 왕위를 수호해야 했다. 문정왕후 사망 후 윤원형과 보우를 내쫓고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시도했지만 결국 승하하게 되었다.
정치
1556년에는 조선이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여 더 이상 줄 토지가 없어서 직전법을 폐지해야 했습니다. 이는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혼란으로 인해 기존의 토지가 사문화되거나 유명무실해져서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공신과 대신들의 땅 불리기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의 지배권 이직업적인 성격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이 조치로 인해 국고를 통일시키고 관료들은 명목상으로 조차 땅을 받지 않게 되면서 한반도의 관료 제도가완전히직업적인성격으로전환되었습니다. 경복궁은 1553년에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종은 신하들의 힘으로 단 한 해 만에 경복궁을 완전히 복원시켰습니다. 이후에는 1555년에는 경국대전주해가 반포되어 조선의 법체계를 완성시켰습니다. 이는 조선 전기의 법체계를 정립한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또한, 수교 제도의 정리와 함께 조선은 명종 대에 마무리된 법체계와 발령된 수교를 토대로 반세기 이상을 버티게 되었습니다. 1555년 5월에는 왜구의 대규모 침입이 발생하여 전라도 일대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은 수군력을 강화하고 수군의 정비를 추진했습니다. 이는 후에 임진왜란 때의 전투에서 수군이 활약할 준비를 갖추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윤원형의 강력한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명종은 권세를 제약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나, 이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명종은 외아들을 잃은 후에는 조울증과 화병을 앓게 되어 내시들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내시들은 명종의 심리적 불안을 더욱 심화시키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명종 대에는 관료제도와 왕권에 대한 새로운 동향과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말년
1565년 4월 6일,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사망한 뒤, 명종은 문정왕후의 척신인 윤원형 일파를 숙청하고 정치를 안정시킴으로써 권세를 확보한다. 이에 따라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며 조정을 채우게 되는데, 이는 성종 시대와 유사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명종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1567년 6월 28일에는 갑작스럽게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게 되어, 자신의 정치 계획뿐만 아니라 후사를 준비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돌아가게 되었다.
후계
명종은 생전에는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지만, 하성군과 다른 덕흥군의 아들들과의 관계를 통해 암묵적으로 동의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특히, 1565년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후계자 문제가 제기됐을 때, 왕비 심씨가 하성군을 병간호하도록 불러들인 것은 사실상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에도 명종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고, 후계자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당장의 일이 아니라고만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명종의 사망 직전, 후계자를 누구로 할 지 묻는 가운데 왕비 심씨가 '을축년에 결정한 대로 한다'며 하성군을 최종 후계자로 결정했습니다. 명종은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왕비의 결정을 따랐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이전에 하성군이 병간호를 받을 때부터 이미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신하들도 이를 수용했습니다. 더불어, 하성군의 부인인 정씨가 사망함으로써 하성군과 외가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반대 의견이 거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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