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 이후
1506년부터 1513년까지의 7년 동안,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종 반정이 일어나, 이를 통해 중종은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기간 동안 왕권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훈구 세력들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종은 사림을 중용하려 했지만, 그들 역시 중종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중종반정 후, 왕의 권위는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았고, 공신들은 왕권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훈구 세력의 장악력이 커지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더욱 심화되었고, 왕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종 4년에는 박원종, 중종 6년에는 유순정, 중종 7년에는 성희안 등 반정의 중심인물들이 사망하면서 정계가 안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종 8년에는 신윤무와 박영문 등이 무신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권은 점차 약화되고,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반정 이후 재위 초반부에 이어 중후반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국방 분야와 토지 소유 등에서도 나타났으며, 정치적인 주도권은 정국공신에서 빼앗겨 신진 사림파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사회적인 불안정이 계속되었으며, 왕권의 약화와 공신들의 갈등은 조선의 정치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치
중종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들을 등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조광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중종도 그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된다고 우려하며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중종과 조광조 간의 의견 충돌은 소격서 혁파와 위훈 삭제 등으로 고조되었습니다. 조광조는 현량과와 같은 개혁을 추구했지만, 이는 예전의 공정성을 따르지 못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비판받았습니다. 중종은 조광조의 이상주의적인 성향에 불안을 느끼고 권력이 제한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중종은 1519년의 기묘사화로 신진 사림들을 처벌했습니다. 이는 위훈 삭제 직후의 사건으로, 친위 쿠데타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중종은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며,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
중종의 치세는 도로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옥사와 피바람이 계속되었습니다. 권력의 변화는 다양한 세력 간의 투쟁으로 나타났는데, 권신들 안에서도 권력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김안로가 세자의 후견 세력이었던 경빈 박씨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나, 그 뒤에는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득세하는 등 권력의 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중종 시대의 권신들은 전기와는 달리 다양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의 변화는 중종의 정치적 특징 중 하나로 꼽힙니다.
남곤 집권기
1519년부터 1527년까지 8년 동안은 중종의 정치적인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강원도와 전라도의 양전이 이루어졌으며, 1519년에는 조광조의 실각인 기묘사화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광조를 죽이려는 중종의 의도와 반대하는 세력이 많아 많은 혼란을 빚었습니다. 남곤은 처음에는 방관하다가 이 사태에 반대하여 중종과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중종은 남곤과 그의 일파를 포함한 다른 세력들을 장악하여 국정을 안정시켰습니다. 이 기간에는 남곤의 온건한 정치로 일반적인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었지만, 구체제의 모순과 기묘사화로 인한 혼란은 여전했습니다. 남곤은 중종의 권력에 따르며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고, 중종 또한 개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안정적인 정치를 유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김안로 집권기
1531년부터 1537년까지의 6년 동안, 중종은 김안로에게 힘을 모아주며 보복정치를 주도했습니다. 김안로는 뛰어난 능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가졌지만 권력욕이 강하고 보복심이 강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공포정치가 시작되었고 많은 공포와 적개심이 일어났습니다. 김안로는 반대파를 탄압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광범위한 보복을 진행했습니다. 이에 중종은 김안로를 제어하기 위해 윤은보 등과 함께 권력을 행사하여 김안로를 탄핵하고 유배시켜 결국 집권을 끝냈습니다.
말년
중종 말년 1544년에 평안도 양전이 이뤄졌고, 1543년에는 《대전속록》이 《대전후속록》으로, 《동문선》이 《속동문선》으로, 《동국여지승람》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속찬증보된 업적 정도가 있습니다. 이후 1544년 11월 14일에 중종은 세자로 있던 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이후 15일에는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 39년 만에 승하하였다.
평가
중종은 변덕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조광조부터 김안로까지, 중종은 타인을 신뢰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제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광조를 죽인 것도, 중종이 처음에는 조광조를 힘차게 밀어주었지만 갑자기 그를 죽여버린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또한 남곤을 몰아내고 김안로를 집권시킨 후에도 김안로를 보복하고 탄핵하는 등, 중종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 혼란이 생겼고 중종의 임기는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중종의 결단력과 권력 유지에 찬사를 보냈지만, 다른 일부는 그의 변덕과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을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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