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초반
연산군은 처음에는 정상적인 군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빈민을 구제하고 정치에 의욕을 보이며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했습니다. 또한 북방 여진족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해적을 퇴치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주장에 따르면, 연산군은 신하들의 간언과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폭군으로 변해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연을 자주 실시하지 않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자사화를 강행한 것 등으로 보여집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조선 군주들이 경연을 싫어했고, 연산군이 경연을 줄인 것은 그 자체로 폭군의 증거로는 미흡합니다. 또한 연산군은 경연을 열때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지적 논쟁에서도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경연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폭군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것입니다. 연산군은 재위 초반에는 국정을 잘 이끌고 민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대간들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적인 견제장치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폭력적인 행동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대간들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 완전한 폭군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군은 조선의 중기 난맥상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사건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폭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과도한 횡포로 인해 국가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폭군은 그의 인격과 통치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무오사화
무오사화는 일반적으로 이극돈과 유자광이 협력하여 사림파를 탄압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성종 실록 편찬을 주도한 이극돈과 사림파인 김일손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부정적 서술을 수정하려 했으나 거부당한 후,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보고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내용을 알고 분개하여 사림파를 탄압하려 했습니다. 유자광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품은 채, 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둔 시를 불살라 버리는 일로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에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김일손을 잡아들이도록 요청했습니다. 연산군은 이를 수용하고 사림파 탄압을 명령하여 무오사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자사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갑자사화를 왕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죽게된 이유를 알고 폭주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왕이 이미 어머니의 죽음 원인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의 복수를 고려한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무오사화를 통해 대간들을 탄압하는 데 성공한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으며, 훈구 대신들을 소멸시키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면, 다른 분석에는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쫓아낸 후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독선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왕의 사치와 방탕으로 대간들의 반발이 시작되었고, 훈구파와 대간들이 연합하여 왕을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왕은 어머니의 쫓겨남을 명분으로 대간들을 탄압하여 갑자사화를 촉발시켰다는 겁니다. 일단 왕이 어머니의 죽음 원인을 알게 된 것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한참 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폭주하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은 폐비와 관련된 시를 지어 바치거나 몇 가지 조치만 취하고 복수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연산군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연산군이 왕이 됐을 때 그가 부왕을 죽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연산군은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등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식의 입장에서 어머니가 죽은 것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 사유가 아버지를 해치려는 것이었다면 보복을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1504년 음력 3월 11일, 홍귀달이 왕의 명령에 반대하여 손녀를 입궐시키지 않았고, 이로 인해 왕이 분노하며 홍귀달을 유배보냈습니다. 이후 3월 20일에는 왕이 친어머니인 폐비를 모함하여 후궁을 때리고 사망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왕은 두 형제를 형벌하고, 대왕대비를 위협하며 불손한 행동을 했습니다. 대왕대비는 그로 인해 한 달 후 세상을 떠났고 이후 왕은 후궁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어머니를 때린 안양군에게 상을 내리며 연산군의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폐비의 복위를 계기로 왕은 폐출 찬성자들을 처단했습니다. 이세좌와 윤필상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이극균은 무죄를 주장하며 사형당했습니다. 성준은 익명서로 들통나자 목숨을 잃었고, 궁중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들의 무덤은 파헤쳐져 뼛가루로 만들어졌고, 몰수된 재산과 처벌을 받은 가족들도 이어졌습니다. 이런 잔인한 처벌로 왕의 명령에 반항하는 사람들은 없어졌습니다.
폭군
연산군은 사화를 거친 후에 삼사와 훈구 대신들이 전락한 뒤에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것을 계기로 즐길 것만 생각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예술, 사냥 등의 취미뿐만 아니라 호색적인 기질도 두드러졌습니다. 실제로 연산군은 수나라 때 죽었다가 조선 시대에 부활한 수양제로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조선의 기틀과 건실함이 흔들리면서 후대의 왕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증오를 받았고, 관료들도 관직을 사직하거나 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 이황, 기대승, 조식 등 대학자들도 관리직을 사직하거나 은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이복동생 중종은 능력 부재로 신하들을 맘대로 교체하고, 옥사를 활용하여 반항하는 자들을 탄압했습니다. 이러한 폭정은 조선의 관리 제도와 조세 제도의 문란을 야기하고, 실용적 관학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연산군은 또한 명나라의 홍무제와 비교될 때 그 행적이 대단히 비판적으로 다뤄졌습니다. 두 군주는 신하들에 대해 가혹하게 대우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는데, 홍무제는 강화된 권력을 건설적인 분야에 활용했지만, 연산군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썼다는 점에서 크게 구별되었습니다.
중종반정
왕은 갑자사화 이후 절대 권력을 남용하며 신하들을 비난하고 위협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박원종과 유자광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은 이에 반발하고 반정을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중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 결과 반정이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정은 조선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백성들의 불안정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조선 사회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에 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은 선제적인 대응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많은 신하들이 합세했습니다. 연산군은 폐위 후 강화도 교동에서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막바지는 왕의 폭주한 행동과 자식들의 비극적인 운명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결국 왕은 왕위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그의 행위는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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