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자을산군은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수대비한씨였습니다. 부친이요 절한 후에는 궁을 나와 사가에서 생활하던 잘산군은 예종이 갑자기 족질로 사망한 후 후계 문제가 논의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희왕후는 권신신숙주와 한명회를 불러들여 후계를 논의하였고, 즉위식이 이뤄지기 전에 자을산군이 왕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예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으며, 정희왕후와 일부 관료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아직 어린 자을산군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보다는 적절한 후계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결정은 현실적인 안전장치로서 권신과 연계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해석됩니다. 인수대비와의 연결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결정은 조선 왕조의 특이한 정치적 상황에서의 급박한 대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장래를 위해 어린 자을산군이 군주로 지명되었지만, 그의 즉위는 예종의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급박한 상황에서의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결정은 세조 이후 왕위 계승에 대한 논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종법에 따라 장자를 양자로 보낼 수 없는 경우, 자을산군은 세조의 아들이자 유일한 후계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즉위는 세조 이후 왕조의 계승을 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결정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폐비 윤씨
정비공 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난 후, 성종은 중전간택령을 내리지 않고 임신 중이던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윤씨는 고대하던 원자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연산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씨가 아이를 낳은 후 성종의 관심은 다른 후궁에게로 돌아갔고, 윤씨와의 관계는 불화로 치달았습니다. 윤씨의 질투로 성종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윤씨는 후궁 내에서 반역에 준하는 행동을 일으켰습니다. 성종은 윤씨를 폐위시키고 그녀의 흔적을 완전히 삭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윤씨와의 관계는 냉담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윤씨를 대체하기 위해 윤호의 딸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윤씨의 흔적을 완전히 삭제하고자 했습니다.
치세
성종의 치세는 총 3개의 기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수렴청정과 세조 때 임명된 많은 공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원상제로 인해 왕권이 약화된 시기입니다. 대신의 세력이 최고점을 찍고,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 세력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보다는 대신과 대간의 대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족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해당 직무의 역할과 권한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두 번째는 성종 7년 친정을 시작으로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성종은 원상제를 혁파하고,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대간을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대간의 권세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세 번째는 대간의 세력을 누르고 대신의 입지를 늘리는 시기입니다. 대간의 권세가 너무 커지면서 대신을 탄핵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성종은 대신의 참여를 높이고 대간의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성종 본인의 요절로 인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습니다.
군사력
성종 시대는 세종 시절부터 시작된 세병제의 붕괴로 인해 조선의 군사력이 약화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군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윤필상의 상소에 따르면 성종 시대에는 군사력의 하락과 함께 왜구 토벌의 성과도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서는 군량 부족과 전쟁 계획의 부정확함으로 인해 병사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허종이 이끄는 조선군은 여진족 마을에 쳐들어갔지만 상대 없이 허무맹랑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패로 인해 성종의 위신은 타격을 입었고, 이후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기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은 여진족들에게 강대국으로 인식되었고, 그에 대한 전과를 통해 강력함을 입증했습니다.
파병
1479년, 명이 건주위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원군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대립되었습니다. 성종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출병을 결정했지만, 일부 정치가들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명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성종은명의요구를거부하지않고출병을결정했습니다. 정벌군은 출발을 시도했지만, 압록강이 얼어있어 기병이 강을 건널 수 없었고, 적유령을 넘을 수 없어 원정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형세를 고려하여 일부 병력만을 동원한 재출병을 결정했습니다. 이번 정벌에서 조선군은 여진족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고 큰 손해 없이 명군에 협조했다는 명분을 세웠습니다.
아들 연산군
성종이 아들 연산군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연산군의 자질은 평범한 수준이었고, 성종이 역사적으로 엄격한 교육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교육 수준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성종의 정치적 실패로 대간들의 권한이 커져나가는 등의 문제는 있었습니다. 성종은 대간과 대신들의 공격에 대처하지 못했고, 연산군은 아버지의 정치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연산군은 대간과 대신들을 꺾어야만 왕권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결국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대간과 대신들을 유혈로 처단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무오사화와는 달리 갑자사화는 큰 실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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