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즉위한 후에도 원래는 왕위와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맏형인 의경세자가 여러모로 유력한 후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57년 9월에 의경세자가 만 19세의 나이로 급사하여 그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저주를 퍼부었다는 야사도 있지만, 실제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은 사실이 있습니다. 1457년 12월,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460년, 세조는 한명회의 딸 한씨를 세자빈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한씨는 출산 후 산후병으로 요절하여 인성대군을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이후 세조는 한백륜의 딸 한씨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삼아 세자빈의 예우를 받게 했습니다. 세자가 13세가 되던 해, 세조는 세자를 조계에 참여시켜 국정운영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자가 부왕의 양위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고, 다음 날인 9월 8일 세조는 승하하여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재위 기간
어린 나이에 즉위한 조선의 예종은 건강이 약했고,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경험했으나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하는 시기에 이를 중단했습니다. 세자 시절에는 총명하면서도 과묵한 성격을 보였지만, 왕이 된 후에는 아버지의 성향을 계승하며 신하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종은 즉위 후 처음에는 구신과 새로운 신신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조 말 년에 견제하려던 구신들이 새로운 신신으로 거듭나며 권력을 강화하자, 예종은 이들을 억제하기 위해 강경책을 채택했습니다. 예종은 새로운 신신을 박멸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구신들이 추천한 신종이 아닌 세조를 기리는 묘호를 선택하며 이들의 권력을 제한하려 했습니다. 또한, 신신들의 대표인 남이와 강순 등을 처형하여 신신을 소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종의 강경책은 세조의 의지와는 달리, 이를 지지하는 군주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종의 강경한 조치는 사회적 불안을 유발하고, 결국 예종은 강력한 반발과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종은 세자 시절부터 부지런하고 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세조가 남이를 지나치게 총애한 것을 지켜보면서도 남이의 자질과 행동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이가 역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돌면서 예종은 남이를 강등시키고 심문을 거쳐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종이 특히나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종은 사소한 부분에도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강행하여 나라의 교육체계와 문화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예종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세조와는 달리 예종은 신하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종은 주로 신하들과의 교류를 피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는 예종이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예종의 왕위에 대한 엄격한 접근과 정책 실행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집중력과 헌신은 조선의 국정 발전에 기여한 측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기축대전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면서 이듬해인 1469년, 한명회가 '병술대전'의 재검토를 건의하여 신속히 완성되게 했습니다. 완성된 '병술대전'은 '기축대전'으로 명명되었고, 예종의 시대에 처음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의 육전 전체가 예종의 재위 동안 완성되었지만, 예종의 죽음으로 인해 최종본 완성의 영광은 성종에게로 넘어갔습니다.이는조선의최고법전인'경국대전'의육전전체가예종의재위동안완성되었지만,예종의죽음으로인해최종본완성의영광은성종에게로넘어갔습니다. 이 '기축대전'은 기존의 '병술대전'을 수정, 보충, 삭제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예종은 규정되어야 할 사항을 상정소에 지시하여 조문들을 보충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대전'에 대한 언급으로, 실제로는 이후에 편찬될 '기축대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축대전'에서는 '병술대전'의 조문들이 수정되고 새로운 조문들이 보충되었으며, 일부 조문들은 삭제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축대전'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설정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종의 시대에 완성된 이 법전은 그가 진취적인 수정과 보충을 통해 조선의 법체계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줍니다.
말년
예종 말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예종이 승하하기 직전까지 건강에 아무 문제 없이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승하가 임박한 시기부터 병에 대한 징조를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예종은 갑작스럽게 문안을 받는 등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병에 대한 경각심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상대로 예종은 즉위한 지 15개월이 지난 후 족질로 인해 승하하게 되었는데, 이는 연조직염으로 발전하고 패혈증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패혈증은 신체의 세균 침투로 인해 조직에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아 발생하는 증상으로, 예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패혈증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종은 족질이라는 병을 유년기부터 앓아왔으며, 이는 그가 즉위하기 전부터 고질적인 질병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예종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강한 사명의식과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종은 자신의 재위를 책임지고자 하며, 여러 사건들을 강제로 진행하면서도 정신적으로 피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런 사건인 까치 울음에 대한 갑사 둘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까치 울음이 황천길을 가게 되는 징조로 여겨져, 이것이 주상 전하(예종)의 위험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한 갑사들은 영순군을 제외한 관련 인물들을 처벌하였으며, 이후 몇 달 뒤 예종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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