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정통성
세조는 자신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면서 정당성이 결여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단종은 세종과 문종 재위기간 동안 이미 견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조는 세종과 문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투쟁한 결과를 이용했고, 이는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즉위하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단종이 더 성숙한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 더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종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시험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에 따라 세조는 단종을 평가할 때 어린 나이로 인한 한계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왕위를 위협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그의 통치는 잔학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형제인 문종과의 관계에서도 형의 무덤에서 사람을 살해하는 등 불경을 저지렀으며,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파헤쳐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형제들과 조카, 신하들을 살해하는 등 정치적인 목적 없이도 가까운 가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의견을 막으려는 인물들도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세조는 후대에도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세조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을 '반정'이라는 이름으로 왕위 찬탈에 시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왕족들이 역모에 휘말려 죽었고, 이중 일부는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유교 기반을 뒤집어놓았고, 무오사화의 원인도 세조에게 있었습니다. 세조가 키운 공신 세력은 세조 이후의 왕권을 약화시켰고, 세조의 견제 시도는 대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군사 분야
세조는 군사 분야에서 진관 체제를 완성하여 조선의 지방별 군사 조직을 통일시켰고, 군사력과 군량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세조는 육군을 정병으로 통합하여 지방군의 주력으로 삼았으며, 무신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실전에서도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군사력 확대에 따른 부작용으로 보법 시행 등으로 부담이 커지고, 군인 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를 초래했습니다. 또한 총통위 폐지로 화포 개발이 약화되는 등 일부 결정은 비판을 받았으며, 진관 체제 도입은 남부지역에 피해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집현전 폐지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국가의 지식인 집합소를 없애버렸으며, 이로 인해 후대에 국가의 성장 동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집현전은 문, 무, 잡학 분야의 연구를 통합하여 국가 전반의 업무를 담당했으나, 후대의 홍문관은 문에 치우친 기관으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관학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후세의 사림들은 학문에 몰두하면서 국가 위기에 직면할 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집현전 시스템 자체가 명확한 규정이 없어 변질되기 쉬운 환경이었으며, 세종의 능력으로 유지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집현전 폐지는 실무자 육성을 차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국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관의 소멸을 의미했습니다.
법 체계
세조는 법조문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법의 배경과 이유, 논의 등을 삭제하여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이는 당장에는 효율적으로 보였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법 조문의 문맥과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지는데, 이를 삭제한 결과 법을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법조문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황당한 법이 만들어지거나 법률 체계에 모순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세조의 단순화된 접근은 초기에는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법률 체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결과 법의 이해와 적용이 어려워지고 법률 체계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신하 관리
세조는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하고, 공신들의 부패를 사실상 방치했습니다. 외척들을 견제하는 대신 세조의 가족과 친인척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권력을 확장시켰습니다. 계유정난은 명분이 부족한 정변으로, 세조는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기 어려웠고 시대의 혼란을 틈타 여러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정변은 세조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세조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검소하지 않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말년
1468년, 세조는 말년에 아들 이황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단 하루 만에 사망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재위 기간에도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시기에 예종이 양위받던 날,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나중에 발생한 남이의 옥사 사건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예종은 상왕으로 즉위한 후, 신료들의 추천에 따라 신종, 예종, 성종으로 묘호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이라면 신종이 선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세조의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예종은 이 추천안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세조를 제안했습니다. 신료들은 세종이 이미 있으니 세조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반박했지만, 예종은 "한나라에도 세종 따로 세조 따로 있었는데?"라며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묘호는 세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후 예종이 양위한 지 1년 후인 1469년, 병세가 악화되어 예종 자신마저 사망하게 됩니다.
'조선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역사 9편 성종 (0) | 2024.03.17 |
---|---|
조선역사 8편 예종 (0) | 2024.03.17 |
조선역사 6편 단종 (0) | 2024.03.17 |
조선역사 5편 문종 (0) | 2024.03.17 |
조선역사 4편 세종 (0) | 202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