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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13편 명종 즉위 1534년 음력 5월 22일에 중종과 문정왕후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종은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 인종의이복동생으로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 눈에 안질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종이 세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이후 중종이 급사하면서 인종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종이 왕이 된 이후, 문정왕후가 왕위에 개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양안 안질을 이유로 인종의 왕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언적 등 일부 인물들이 인종의 왕위를 지지하며 이러한 시도를 무효화시켰습니다. 이후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으로 자신의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명종 시대에는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이에 따라 백성들과 유학자들 사이에 반감이 증폭되었습니다. 특히,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조선역사 11편 중종 중종반정 이후 1506년부터 1513년까지의 7년 동안,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종 반정이 일어나, 이를 통해 중종은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기간 동안 왕권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훈구 세력들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종은 사림을 중용하려 했지만, 그들 역시 중종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중종반정 후, 왕의 권위는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았고, 공신들은 왕권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훈구 세력의 장악력이 커지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더욱 심화되었고, 왕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후 중종 4년에는 박원종, 중종 6년에는 유순정, 중종 7년에는 성희안 등 반정의 중심인물들이 사망하면서 정계가 안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종 8년에..
조선역사 10편 연산군 즉위 초반 연산군은 처음에는 정상적인 군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빈민을 구제하고 정치에 의욕을 보이며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했습니다. 또한 북방 여진족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해적을 퇴치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주장에 따르면, 연산군은 신하들의 간언과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폭군으로 변해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연을 자주 실시하지 않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자사화를 강행한 것 등으로 보여집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조선 군주들이 경연을 싫어했고, 연산군이 경연을 줄인 것은 그 자체로 폭군의 증거로는 미흡합니다. 또한 연산군은 경연을 열때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지적 논쟁에서도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경연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폭군이라는 주장은 지나..
조선역사 9편 성종 생애 자을산군은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수대비한씨였습니다. 부친이요 절한 후에는 궁을 나와 사가에서 생활하던 잘산군은 예종이 갑자기 족질로 사망한 후 후계 문제가 논의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희왕후는 권신신숙주와 한명회를 불러들여 후계를 논의하였고, 즉위식이 이뤄지기 전에 자을산군이 왕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예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으며, 정희왕후와 일부 관료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아직 어린 자을산군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보다는 적절한 후계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결정은 현실적인 안전장치로서 권신과 연계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해석됩니다. 인수대비와의 연결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결정은 조선 왕조의 특이한 정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