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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4편 세종

생애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 세종

태종의 생애는 이방원과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방원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 쟁탈전을 벌여 왕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습니다. 이후 태종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망나니 짓에 좌절하고 세종을 후견인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후에 한국사 최고의 성공을 이룬 세종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종이 충녕대군으로 봉해진 1408년부터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양녕대군으로 세자로 세자로서의 지위를 견인하고, 그 후 대군으로 진봉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태종은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키워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책을 취미로 삼아 병이 나 앓을 때도 책을 읽는 데 집중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통해 다재다능한 능력을 키워냈습니다. 태종은 자신의 아들인 세종에게 군권을 넘겨주는 등의 결정을 내려 조선의 안정과 왕권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또한, 세종이 양녕대군을 계속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세종의 훌륭한 통치 능력이 한국사에 큰 성공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태종은 세종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하면서도 본인의 다양한 재능을 세종에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농업

세종 시기의 농지 조사에서 나타난 토지면적은 기존의 평가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으며, 이는 세종 정부의 토지 관리와 세수 파악이 철저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은결을 포함한 토지를 전수조사하여 정확한 데이터를 확보했으며, 이는 세수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산량은 기술력 등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가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수세결수와 전체결수의 차이는 지방재정 운용을 위한 토지와 서원소유토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의 업적을 논할 때 생산량 증가보다는 토지 관리와 세수 증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교육

세종은 경학에 뛰어나고, 신하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대신 그들로부터 학문을 배우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그의 높은 학습 열정 덕분에 궁궐에서도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단순히 자신의 발전뿐만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에는 관리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복지

세종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서도 특히 애민 정신이 강했던 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종은 조선 시대에 여자 노비(즉, 관비)들의 출산 휴가와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출산 후 100일 동안 휴가를 주고, 산모의 복무 면제 조치를 내렸으며, 남편에게도 산후 1개월간 휴가를 부여하는 등 현대의 근로기준법보다 훨씬 관대한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또한, 노비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집현전의 응교인 권채와 그의 아내를 형벌로 처단하는 등 엄중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세종은 "노비는 비록 천민이지만, 다 같이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라는 신념 아래 노비들을 보호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군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태종대에 시행된 노비종부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부법을 폐지하고, 노비종모법을 도입했습니다. 노비의 급증을 막기 위해 양천교혼을 금지하고, 종친과 관료, 40세 이상인 백성의 자손에게는 예외를 두어 노비 인구의 증가를 제한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노비의 수는 감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법은 신분 변경 소송을 악용하는 사례를 예방하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인의 급증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국가 운영에 큰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공노비는 관청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므로 그 수를 무작정 줄일 수 없었습니다. 세종은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궁궐로 초청하는 연회인 양로연을 자주 베풀었습니다. 세종은 《세종실록》에 따르면 어떤 노인이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소를 받아들였으나, 100세가 넘는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쌀과 옷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한 번은 감사가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00세가 된 김씨 노인에게 주는 쌀을 줄이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세종은 "100세가 넘은 노인은 드물기 때문에 후한 구휼이 필요하다"며 요청을 거부하고 종전대로 쌀을 주도록 했습니다. 또한, 고봉현의 107세 노인에게도 옷과 양식을 하사했는데, 이 노인은 감격해서 세종이 하사한 옷을 몸 위에 덮고 누웠다가 곧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의 어른 대접은 그의 인류애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이는 그의 친애와 예의에 기초한 행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종은 어린이와 노인에게 자자형을 금지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죄를 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더위가 심한 날에는 유배형이 하의 죄수를 사면토록하고, 석방되지 않은 죄수의 편안함을 챙겨주었습니다. 냉수와 목욕 시간을 정하고, 추위를 막기 위해 옥 안에 짚을 쌓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죄수의 자녀 중 부양해줄 사람이 없는 경우 국가가 이를 부양할 사람을 지정해주었습니다. 세종의 이러한 조치들은 죄수의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는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음악

조선 시대 세종이 창안하신 한국 국악기 보법인 '정간보'는 악보의 형태가 우물 정이 위아래로 연결된 모양을 가리킵니다. 이는 한국 국악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보법 중 하나로, 음악의 길이와 리듬을 명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유량악보로 평가되며, 동양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유량악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반포를 통해 많은 노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전부터 언어와 음운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 분야를 심층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습니다. 세종은 중국어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이를 통해 외교적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 위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로 결심한 후, 그는 신하들에게 강력하게 대응하였습니다. 이는 세종의 강인한 의지와 열정이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 위해 집현전과의 협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세종 본인이 한글을 개발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맡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세종의 뛰어난 지식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종의 한글 창제는 그의 개인적인 노력과 열정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 수학

세종대왕은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습니다. 이순지, 이천, 장영실 등에게 천문과학 기구를 만들도록 명령하고, 물시계 인자격루와 옥루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교 등을 만들어 설치하였고, 의학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김예몽, 유성원 등에게 의방유취초본을 만들게 하고, 이를 토대로 《의방유취》를 편찬하였습니다. 세종은 수학을 직접 공부하기도 하였고, 정인지를 포함한 수학자들과 함께 역법서인 '칠정산내편'과 '외편'을 편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여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날짜 계산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과로

세종은 업무 중독으로 하루에 5시간 수면을 제외하고는 업무를 쉬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강한 학구열과 과로로 시력이 나빠졌으며, 자치통감훈의 편찬으로 눈 건강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말년에는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했고, 결국 세종 말년의 업적 대부분은 문종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신병주 교수는 조선의 황금 시대를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엄격하게 다루어 백성의 편안을 위해 고달파야 백성이 편하다고 말했으나, 신하들은 엄청난 업무 앞에서 쉴 틈이 없었고, 그 업무에 대한 완벽주의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말년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헌신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국정을 열정적으로 돌보았으나, 육식을 즐기고 사냥을 즐기지 않아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렸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재위 후반기에는 국정을 세자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받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 이후 건강은 더욱 나빠졌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자의 앞날을 부탁한 뒤 52세에 영릉에서 승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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