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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3편 태종

태종 생애

조선 3대왕 태종
태종

태종(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 과거에 급제한 경력이 있었으며,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398년(태조 6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일파를 숙청하고 왕세자 의안대군과 무안대군을 지지하여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태종은 즉위 후에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숙청하는 등 냉정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는 그의 후계자인 세종의 훌륭한 치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건국 초기의 혼란을 잘 수습하여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훌륭한 책무를 수행하여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병 혁파로 왕권 강화

태종은 신하들의 사병을 완전히 폐지하고, 사병을 통일된 체제로 개편하고, 이를 3부로 이관하여 왕위에 오르기 위해 사용했던 사병를 제거하고 모든 군대를 중앙 정부로 통합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정도전 재위 때 시도되었지만 실패한 사례를 감안할 때, 태종의 정치적 수완과 통찰력이 뛰어났음을 증명합니다. 정도전이 이루지 못한 것을 태종은 성취했다는 점에서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결단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태종은 이방원이 왕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군 폐지의 명분을 찾기가 용이했으나,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내어 조선의 군사 체제를 현대적이고 효율적으로 재편한 데에는 태종의 뛰어난 리더십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공신, 외척 숙청으로 왕권 강화

태종은 많은 사람을 죽여서 유명한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숙청은 사실 대규모 살육이 아니었습니다. 태종은 정교한 정치적 계획과 정확한 타이밍을 통해 신하들을 철저하게 선별하고 숙청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능력은 공신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핵심 인물을 정밀하게 선택하고, 숙청의 명분을 얻기 위해 세심한 준비를 거쳤다는 점에서 빛났습니다. 태종은 공신들을 대신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경우에는 망설임 없이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에게는 귀양을 내려놓거나 강등시켰습니다. 또한 외척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처벌했는데,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습니다. 태종은 특정한 목표를 위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숙청의 명분을 얻기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통해 군주의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태종의 숙청은 주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핵심 인물을 집중적으로 정밀 타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숙청을 통해 군주는 자신의 영향력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관제 정비

태종은 태조 시대에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대간과 사관 등의 기관에 상당한 힘을 부여했습니다. 이들 간 언하는 간관이나 사관들은 자주 귀찮게 느끼고, 그들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을 자제시키려고 했지만, 태종은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간관을 통해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던데, 대신들이 간관 없이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자들을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라며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삼사가 확립된 것은 태종 시대로, 태종은 관리 감찰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 기관으로 만들어 간쟁 기능을 담당시킴으로써 이를 이끌었습니다. 대간을 재상에서 분리한 후 의정부에 자문 기능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6조를 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직 계제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습니다.

행정 정비

태종은 고려의 구제처럼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여 호구를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호패를 지니도록 명령하여 오늘날의 신분증으로 볼 수 있는 호패를 소지하도록 했는데, 이는 유민 방지와 인적 자원 확보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집계치는 상당히 낮았으며, 왕조 초기의 행정력 부족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서얼금 고법을 도입하여 서얼 출신에게 문과 응시의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양반의 수적 증가를 억제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신분 차별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한반도를 8도로 구획한 것도 태종 시대의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이며, 유향소를 통제하는 경재소도 설치되었습니다.

경제 정책

태종은 명의 화폐 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는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당시 조선은 교역이 미약하고 물물교환에 의존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화폐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이 개혁은 후에 세종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조선 후기의 숙종대에 상업이 활발해지면서야 상평통보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양전 역시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태조 시대부터 시작된 양전은 태종 시대에도 이루어졌으나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양전을 실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경제에 관한 부분에서 미숙하거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특히 집계 자체가 철저하지 못했으며, 중과세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면서도 공신들에게 특혜를 준 점이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양전 실패로 인해 조세의 형평이 굽히쳤으며,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추가로 공신전을 통해 특혜를 주는 등 경제에 관한 좋은 점수를 얻기는 어려웠습니다.

상왕

태종은 1418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지만,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습니다. 세종이 30세가 되기 전에 군권을 넘겨주었고, 일부분야에 대해 대리청정을 하였습니다. 또한 세종의 외척인 심온의 권력을 막기 위해 박은등을 시켜 심온을 숙청하고 그 집안을 파괴했습니다. 태종은 세종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진 대마도 정벌 계획을 주도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상왕이 되어도 조선의 안정과 세종의 왕권을 위해 노력하였고, 말년에는 여행과 사냥을 즐기면서도 꾸준히 국정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세종을 후계자로 삼았고 그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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