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실록 편찬 경위
태종 8년(1408년)에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1409년 8월 28일에 춘추관 관원에게 《태조실록》을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춘추관 기사들은 당대의 기록을 정리한 전례가 없고 후세에 의심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실록 편찬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태종은 당대의 기록임을 강조하여 이를 반박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예조 등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결국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413년 3월에는 실록이 1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록의 내용이 번잡하고 중복된 기사가 많다는 이유로 세종 20년(1438년) 9월에 다시 개정되었고, 최종적으로 1442년 9월에 완성되었다. 그 후 1448년에는 정인지가 증수하고 1451년에는 약간의 개정이 있었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전해져오고 있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1388년, 이성계와 최영은 이인임일파를 제거하고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명나라의 도발에 맞서기 위해 최영의 대처 능력에 의존했으며, 최영의 지지로 인해 제2차 요동정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출정 반대를 했지만 무용하며, 최영은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 퍼졌다. 요동정벌을 위해 최영은 총지휘관으로 선정되었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원정군은 28명의 원수들이 각각 부대를 거느리며 휘하에 있었으며, 최영은 총지휘관이지만 사실상 원수들의 통수력이 더 강했다. 이성계의 동북면 군사들은 가장 강력했으며, 요동정벌 원정군은 이성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요동정벌을 위해 움직이다가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하게 되었으며, 이후 개경을 공격하여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세운 창왕 역시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후예라는 이유로 과거의 왕위로부터 쫓기게 되었다. 최영과 우왕, 그리고 창왕은 참살되었으며, 이성계는 '감록국사'로 임명되어 고려의 사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 역시 왕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많은 불안을 겪었다. 결국 공양왕 시기에 본거지인 화령군의 백작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양왕파였던 정몽주와의 갈등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공양왕이 폐위함에 따라 이성계는 국사로서의 역할을 마치게 되었다. 1392년 7월 17일, 감록국사 이성계는 국새를 받고 수창궁에서 고려의 사직을 자신이 이어받았음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실록에 태조의 즉위를 기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한 다음날 명나라 예부에 상행문서를 올려 종친이 아닌 타성의 문하시중 이성계를 권서국사로 추대할 것을 원했다. 이후 1달이 조금 지나자 이성계는 재차 권지고려국사 명의의 표문을 올려 권지군국사로 추대된 것을 홍무제가 재가해줄 것을 청했다. 공민왕 사후 악화된 대명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 급진 사대부들은 이를 통해 이성계의 즉위를 이례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성계가 왕으로 자칭하지 못한 것은 태조 왕건 이후부터 시작된 일종의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이성계 또한 왕건과 고려의 관례를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후계 결정으로 인한 참극
태조는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실력자들과의 혼인 관계를 살펴보게 되었다. 이성계의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하고, 여기에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받았다. 또한, 방우와 지윤은 각각 김천서와 최인두의 딸들을 후실로 받았다. 이렇게 이성계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방씨는 고려 구세력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결혼하였고,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사위이자 변안열의 사위가 되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고려 구 세력과의 관계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하였으나, 태조는 후계 문제를 결정할 때 구 세력과의 연계성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결정으로 태조는 일부 신료들의 반대와 이방번의 성품 등을 이유로 이성계의 막내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방번의 배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태조는 약간의 당황도 보였다. 만약 이를 미리 계획하고 준비했다면 더 명분 있는 이방석의 책봉 명분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태조는 예방 조치로 국초 왕자들과 사위들의 군호를 정하고 이들에게 절제사 임명을 하여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로써 방과, 방번, 이제는 의흥친군위절제사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는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기 10일 전에 이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의 급진 정책에 대한 반발은 예상을 초월했다. 이로 인해 왕실 집안 싸움이 시작되고, 병사들도 혼란에 빠졌다. 태조의 결정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었지만, 세자를 지키는 데 힘을 싣고 있던 방번은 세자 자리를 빼앗긴 탓인지 자신의 동생인 세자의 위기를 방관했다. 무력으로서의 태조의 권위는 강력했지만, 그가 병환으로 인해 거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런 난리는 이성계의 용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두 아들을 잃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말년
형제를 둘이나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싫었는지, 이성계는 말년에 1401년 11월 한양을 떠나 이태조 행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즉위 사이에 이성계가 완전히 몰락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한 가지는 양위 반년만에 개경으로 복귀할 때, 신덕왕후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새로운 수도를 떠나기 싫다며 저항한 사실이었다. 또 다른 사건은 태종이 세자로 즉위한 후, 태종이 세자들을 유배로 보내는 일이었다. 이때는 태종이 이성계와 관련하여 조영무, 조온, 이무를 비롯한 세 자의 유배를 요구했는데, 태조가 태종에게 이것을 요청했지만 사면을 하고 모두를 관직으로 복귀시키는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이들 중 이무는 민씨 형제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나중에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함께 제거당하게 되었다.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인 함흥차사라는 속담이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시기 위해 함흥부에 여러 사람을 차사로 보냈으나 이성계가 모두를 활로 쏴 돌아오지 않았다 라는 야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차사로 간 이성계에게 활을 맞은 사람은 없었다. 결국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 시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에 이성계는 조사의의 난을 일으켰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왕의 친정이었으며, 주도자는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조사의의 반군을 이끌었지만, 결국 이방원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배했다. 그 후 이성계는 아들과 화해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절이나 온천을 즐기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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