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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26편 고종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
고종 어진

조선의26대 국왕인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살아 있을 땐 실록이 쓰이지 않다가 순종까지 승하한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쓰였습니다. 실록이라는 이름은 붙였지만 일제에 의해 누락과 왜곡이 심하다고 평가됩니다하지만 이미 근현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실록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여기서부턴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역사적 기록으로 쓰여집니다. 이제 고종의 생애업적평가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1. 즉위

정조의 증손자 헌종이 후손없이 돌아가자 방계가문인 철종으로 보위가 이어졌으나, 1863년에 철종이 후계없이 세상을 떠나시며 왕위 계승권은 익평군과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에 빚어졌습니다. 흥선군은 익종의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동의를 얻었고, 그의 아들 재황은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왕대비 조씨는 수렴청정을 하셨으며, 흥선군은 대원군으로서 집권하셨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사건으로 남습니다.

2.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기는 사실상 친정이 시작된 1866년부터 형식적인 친정이 이루어진 시점으로, 흥선대원군은 법적 근거 없이 '국왕의 생부'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종이 22세가 되면서 자신의 주도적인 통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 세력과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여흥 민씨 세력을 등용하여 힘을 보강하셨습니다. 이 시기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웠는데, 청전 도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국고가 줄어들고 세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고종은 호포제와 사창제 등을 유지하면서도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셨으나, 재정적 문제는 여전히 매우 심각했습니다.

3.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또는 강화도 조약,은 1876년에 조선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 중 하나입니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했습니다. 이때 일본 내에서는 정한론자와 조선 개혁론자가 존재했습니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사죄와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수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로,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사로 보내어 조선과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부산에 입항하고, 교섭이 진전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할 것을 본국에 요청하고,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에 매우 긴장하여 회담을 열기로 하고,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여 정식 회담을 열었습니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사대주의에 찌든 청 대의 해금정책과 유사했으며, 조선은 근대무역에 있어서 일본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해금 철폐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조선을 속방으로 명시하였고,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관세권이 설정되면서 무관세를 고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883년에는 조일통상장정이 맺어져, 조선과 일본 간의 새로운 통상 장정이 성립되었습니다.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이야기되어 왔지만, 일본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조약 체결은 일본의 정한론자들이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수호조약을 체결한 우호 국가를 대상으로 징벌하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임오군란

임오군란은 1882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 불량쌀로 지급하여 일어났습니다. 이는 10년 전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들이 중전과 외척 민씨를 제거하고 비리를 척결하며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을 벌였던 것을 확대 시켰습니다. 난은 관련자들의 살해와 함께 성공을 보이려 했지만,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여 진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되었으며, 민씨 외척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급진개화파들이 조정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난의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 예전의 시험이 열리며 이완용, 서재필 등이 출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갑신정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들은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 넘기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여 경우궁으로 옮기고 관료들을 몰아내며 법이 지칭하는 대로 사형시켰습니다. 고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려고 했지만,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애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을 단독으로 선언했지만, 명성황후의 촉구에 따라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패착으로 이어져 청군과 조선군이 합세하여 궁을 포위하면서 급진 개화파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이에 일부는 일본으로 암암리에 도주하며 개화 이야기는 묻히게 되었고, 박영효 등의 일부는 조선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게 됩니다. 이로 인해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 종주권은 오히려 청에게 공고해지며, 일본은 조선에 한성 조약을 강요하고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6.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 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란으로, 농민들의 대중적인 불신과 분노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혁명은 당시 조선 왕실에 대한 반란으로도 볼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일본군과 청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이 혁명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큰 시도였으며, 현재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모두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사건입니다.

7.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주재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 경복궁 침입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조선군 훈련대, 일본인 낭인들의 공동 작전으로 명성황후를 비롯한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알려졌다.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이 사건의 배후가 당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내각 각료들, 그리고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일본의 친일 세력을 다시 세우고, 침략을 막으려던 고종의 동맹자를 제거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결과,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해 을미의병으로 이어졌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이 사건을 조선의 내부 분쟁으로 포장하려 했으나, 외국인들의 목격과 외신을 통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요 주역임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일본의 악행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8. 아관파천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 25일까지 고종과 왕태자였던 순종이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과 친일내각이 장악한 경복궁을 탈출해 어가를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겨 피신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안들면 칼들고 경복궁에 달려가던 일본이였지만, 러시아의 허가 없이는 러시아 외교공관에 있는 고종을 압박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대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패배 후, 러시아가 조선에서 손을 떼기까지, 일본은 조선을 건드리지 못했고 이로써 조선 주도의 개혁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고종은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광무개혁을 이루어냈습니다.

9. 을사늑약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일본군이 경운궁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위협적인 국서를 가지고 고종을 직접 압박했습니다. 국서의 내용은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면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종이 이를 거부하면서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그러나 이왕 협상을 할 것이라면 대한제국에 관대한 조건으로 합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완용이었습니다. 이후 고종은 자신은 인후통을 핑계로 일본과의 협상을 떠나고 이를 대신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협상은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넘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이후 대한제국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유림들과 백성들 사이에 거의 전국적인 혼돈이 일어나고,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며 을사의병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항은 을사늑약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10. 헤이그 특사와 강제 퇴위

을사늑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권을 강탈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사실상 이는 대한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고종이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각국의 대사관을 강제로 철수시켰습니다. 고종은 이때쯤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은 고종의 저항을 막기 위해 그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대한제국의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지만, 일본의 영향으로 실패했습니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헤이그 특사로서의 최후를 의미합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멋진 일을 하셨네요. 그러나 앞으로는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십시오."라고 비웃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협박했습니다. 고종이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고종을 사실상 궁에 감금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대리청정의 명령을 내렸지만, 일본의 강요로 순종으로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1. 말년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식혜를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나 목이 마르다고 차를 마셨는데, 그 뒤 복통을 호소하다 각혈한 뒤 붕어하였습니다.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소문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으로 굳게 믿고 가쿠슈인에 다니면서도 반드시 먹는 물을 보온병에 따로 챙겨다녔으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조현병까지 걸렸습니다. 심지어 일본 황족인 며느리 이방자 여사조차 시아버지가 독살당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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