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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25편 철종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
철종

조선의 제25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인 철종(哲宗)은 장황제(章皇帝)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경험으로 유명한데, 이로 인해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국왕이 되기 전까지는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차기 군주로 옹립되었습니다. 정치적 감각 부족으로 제대로 된 정치를 이끌지 못했으며, 마지막 임금으로서 종신하여 왕좌를 이어받는 자손 없이 요절한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기도 합니다.

목차

1. 철종의 생애

2. 유배생활

3. 즉위

4. 섭정과 친정

5. 임술농민봉기

6. 말년

1. 철종의 생애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원범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는 변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李裀)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이광(李壙)이었고,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로서 부친의 첩실이셨습니다. 철종 가족은 역모에 엮여 강화도에서 생활 했습니다.

2. 유배생활

1836년'남응중역모사건'으로인해철종일가는다시강화도로유배되었습니다.이후1844년에는철종의이복형이원경이'민진용역모사건'에가담하여사사되는사건이있었습니다.이로인해아버지인이광을포함한일가는교동도로유배되었으며,이후에도왕족의지위를누리지못하고강화도에서살아가야했습니다. 강화도에서는 철종 일가가 감시를 받았고, 주민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사람이 철종의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모욕적인 언행을 했지만, 후에 철종이 왕위에 오르더라도 이를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화부 유수가 일가를 감시하는 것이 너무 심해 집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철종은 해당 유수를 오히려 승정원승지에 임명하였습니다.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이자 이복형제인 상계군이 역모자였기 때문에 작위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들 철종이 왕위 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었으며,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습니다. 철종은 유년 시절부터 강화 출신인 유력한 문인이자 학자인 이시원의 인품을 존경하여 중용하였으나, 조정의 거대한 안동김씨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참다운 정치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각에서는 '강화도령'이라 조롱받았으며, 이시원과의 교류를 통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안동김씨의 세력에 맞서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시원은 1815년에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유신으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인품과 지식을 존경하고 중요시한 철종은 안동김씨의 세력에 맞선 정치적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3. 즉위

1849년,철종이원범이19세였을때,헌종이갑작스럽게승하하여후계자없이왕위에오르게되었습니다.대왕대비순원왕후는헌종의조카이자철종의7촌재종숙인이원범을대왕대비의자격으로입적시켜차기국왕으로지명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왕족 남성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대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철종은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사도세자에게는 정조 외에도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이중 한 명인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의 자녀들은 종친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종친의 범주에서는 대군의 손자까지만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원범의 아버지 이광은 상계군 사건으로 인해 역적 집안이 되어 종2품까지 승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었습니다.철종은 즉위 전날에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덕완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종친 신분이 아니었던 이원범이 왕자로 입적하면서 종친 신분으로 전환한 뒤에 즉위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는 생물학적 혈통보다는 종친의 신분을 우선시하는 조선의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철종이 즉위하면서 일가족은 모두 복권되었습니다. 작호가 없었던 아버지 이광은 전계군에 봉해졌으며 대원군이 추가되어 전계대원군이 되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군에 봉해졌는데, 이욱은 영평군으로, 이명은 회평군으로 봉해졌습니다.

4. 섭정과 친정

철종은순조의양자자격으로왕위에오르게되었지만,즉위직후에는실권이안동김씨에게있었습니다.1851년에는김문근의딸을왕비로맞아들이면서순조,헌종,철종세임금의중전이안동김씨가문에서나오게되었습니다.이로써안동김씨의세력이강화되어중궁전까지소유한다는소문까지나오게되었습니다. 철종은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한 탓에 정사는 세도가들에게 맡겨졌으며, 자신도 이를 인식하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정사는 사사로운 인맥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시골의 관리가 한성에 입경한 뒤에도 국왕인 철종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군수에 임명되었다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철종은 궁녀와 술에 친근해지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지만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세력에게 있었던 철종은 1859년에는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1854년에는 제주도의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육지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받을 수 있도록 관리가 파견되어 합격증서를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안동 김씨세력의 강세로 인해 자신의 의지를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857년에는 순조의 묘호를 순종에서 순조로 개칭하는 등 일부 정치적 결심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조선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자, 1862년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농민항쟁이 발생했습니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을 직접 징계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고, 그 이후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구체적인 조치가 이뤄지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1860년에는 경주에서 최제우가 창설한 동학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조정은 이를 탄압하고 최제우를 처형하는 등 대응하였습니다. 또한, 천주교 역시 민중 속에서 유행하였지만 조정은 이를 탄압하였습니다.

5. 임술농민봉기

임술농민봉기는 재정에 구멍이 나서 세금이 줄줄 새는데도 중앙에 상납도 해야하고 지방 재정도 필요했기에 모자란 부분들이 일반민들에게 전가되면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관리들은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일반민들에게 기존에 납부하던 지세에 추가로 동전이나 포목을 더해서 납부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것이 결렴이라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이서배들이 빼돌린 금액을 일반민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이포징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이는 『일성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주 사람들은 1859년에 단체로 서울에 올라가 비변사에게 억울함을 알렸습니다. 중앙에서 보기에 진주의 관리들이 과도한 세금을 거둔 것으로 보였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묻고 부족분을 채워넣으라고 함과 동시에 부정부패에 관련된 수령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진주목사를 계속해서 갈아치워도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방으로 도망갔습니다. 1861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백성들이 도망쳐서 거두어들이지 못한 세액이 전체 세금의 약 60%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1861년, 진주목사 홍병원은 8천 석은 결손 처리해줄테니 2만 석은 채워 넣으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도결에 결당 6냥 5전을 추가하고 사족들을 모아 협조를 구했습니다. 도결은 세금 납부 관행으로, 조세의 부족분을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중앙과 지방 간의 세금 납부와 독촉, 운송 문제로 인해 도결 징수액이 늘어나거나 2중 3중으로 납부를 강요받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주목은 총 8만 4천냥에 달하는 도결을 책정하고 요구를 이행했습니다.

6. 말년

본래 몸이 병약한 상태였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펼치지 못한다는걸 깨닫고 주색을 가까이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고, 1861년 이후 거의 병상에 누워있거나 의원의 어배진을 받으면서 겨우 정무를 처리했습니다. 연회나 만찬 중에도 뻐꾸기 소리를 듣고는 슬픈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고, 매천 황현은 그를 선천적으로 연약하고 둔하다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사돈들을 통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려는 은밀한 교섭을 시도했습니다.1864년 1월 16일 (음력 12월 8일), 철종은 14년 만에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승하했습니다. 후사 없이 사망한 철종을 대신하여 신정왕후(익종비)와 대신들이 모여 후계자를 선정했는데, 이명복(훗날의 고종)이 후사로 낙점되었습니다. 이로써 효종의 직계 남자 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후손가에서 태어났으나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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