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손기간
동복형 의소세손이 2살에 요절한 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실질적 장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조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영조는 정조가 의소세손의 상중에 태어났다고 처음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어린 나이에도 그 까다로운 영조조차 만족시킬 만큼의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뻐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정조의 재능을 하루가 멀다 하고 자랑했으며 300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도다라는 몹시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에 이르른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두손을 빌며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매정하게도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세손까지 뒤주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느냐. 어서 데리고 나가라"며 정조를 쫓아냈습니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폐서인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었으므로 궁궐에 있을 수 없었기에 외조부 홍봉한이 있는 사가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도 생이별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희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정조는 상중(喪中)이었지만 영조가 교서를 내려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더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고 《한중록》은 그 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썼습니다. 이 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대처분이라는 말로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에게 정말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 홍씨의 피눈물을 머금은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습니다. 어린 정조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자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떼어놓았습니다. 영조의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과 그 결과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왕세손 시절에는 영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는데 《영조실록》에서는 한번도 세손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였습니다. 영조가 말년에 치매가 매우 의심될 정도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세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굳건했습니다.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반면 원손인 정조는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 하는 등 엄청나게 예뻐했습니다.
즉위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며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척신들을 엄정히 처벌했습니다. 특히 정유역변 사건에서는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인 효임 등이 강용휘와 전흥문을 이용하여 발각되었고, 이로 인해 홍계희 계열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자객 침투 사건에서는 홍국영의 능력이 발휘되어 사건이 해결되었으며, 홍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과의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며 결국 강제로 사사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장용영
정조는 국방체제 개혁과 군영 통합을 위해 장용영을 설치했습니다. 조선의 오군영 체제는 비효율적이었으며 군사력 강화와 재정 효율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을 통합하여 중앙 오군영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를 통해 도성 방어 및 국방력 강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각 군영이 과다한 재정을 필요로 하며 이를 조달하기 위해 삼수미세와 같은 추가 조세가 부과되었습니다. 장용영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설치되었으며, 둔전을 통한 재정 조달과 농업 생산력 향상을 통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존 군영의 조세권과 부서를 통합하여 군영의 효율화를 이뤄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용영은 국가 재정의 중요한 출처가 되었고, 정조 말기에는 화성 건축의 경비까지 장용영에서 출연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원화성
정조는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화성을 건설했습니다. 대신들과의 의논을 통해 철저한 계획과 실행을 펼쳤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영조의 명령으로 장헌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화성을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제작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화성 축조는 수도의 북쪽과 서쪽, 동쪽과 더불어 남쪽에 군사적 통제를 놓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지에 위치한 수원에도 성을 쌓아 상인들의 유통을 활성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화성은 수도 한양에 비해 규모가 작았으며,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족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극복한 형태였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였기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정조의 노력은 수원화성을 중요한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대전통편
1781년에 정조가 법전 통합을 결정하고, 1785년 찬집청을 설치하여 통일 법전을 완성했습니다. 이 법전은 기존의 분리된 법전을 통합하여 법제 운용을 일원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법령 체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입니다.
신해통공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 시전 상인들의 특권이 감소하면서 불만이 증가했습니다. 이에 정조는 금난전권을 부여하여 시장을 폐쇄적으로 만들었지만, 이는 영세 상인과 빈민층에게 불이익을 초래했습니다. 또한 시전 상인들과 중앙 정부 고관의 연계로 뇌물 문제도 심각해졌습니다. 이에 정조는 통공 발매 정책을 통해 특권을 제거하고 경제 구조를 변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상업이 더욱 자유로워지며 조선의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냈습니다.
문체반정
문체반정은 신선한 문물에 관심을 보이는 선비들을 탄압한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이옥에 대한 탄압은 가혹했습니다. 그러나 문체반정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했습니다. 정조는 성리학 근본주의자로서 유학 경전을 중시하고 다른 문학적 양상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문체반정은 성리학적 사상과의 괴리를 지적하며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또한 통공 발매 정책과 함께 문체반정은 상업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조선의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년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이어서 신하들과의 갈등이 빈번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의 논쟁은 5차례에서 6차례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잔병이 잦았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많은 일을 밀어붙였습니다. 정조의 마지막 해에는 노화와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수명이 단축된 것은 과로의 결과로 여겨졌으며 종기라는 고질적인 질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열악한 의료 기술로부터 인삼 등의 탕약과 요법에만 의존했으며, 종기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신하들과의 논쟁을 벌이고 이를 마친 후 자리를 박차며 신하들과의 논의를 중단한다는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정치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오회연교'였습니다. 이후 4주 후인 6월 28일에 정조는 승하하게 되는데, 신하들과의 논쟁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가 이미 가지고 있던 종기 질병을 악화시켜 죽음으로 이끈 것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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