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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조선역사 23편 순조

조선 제 23대 국왕 순조
손상된 순조 어진

어진

일제 강점기 당시 순조의 어진은 총 4 채가 있었으나, 1954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순조 어진 또한 다른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화재로 손상을 입었는데,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은 결과로 손상이 더해졌습니다. 어진들은 상당 부분이 돌돌 말려진 상태에서 화마에 휩싸였으며, 특히 얼굴을 포함하여 반 이상이 타버리는 바람에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즉위

1800년, 순조는 당대 최연소로 즉위하여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순조는 세자 시절을 상대적으로 짧게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서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자 책봉조차도 정조의 건강 악화로 인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세자로 책봉된지 4개월 후인 1800년 6월에 아버지인 정조가 승하하여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순조는 세자로서는 단 4개월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순조의 즉위 당시 가장 큰 어른은 정순왕후였으며, 그녀는 사학에 대한 강력한 탄압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신유박해와 같은 천주교 박해 사건이 발생하며, 남인과 노론 시파가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순조의 왕위 계승과 그의 정순왕후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더욱 명확히 합니다.

세도정치

순조 시기부터 헌종과 철종에 이르는 3대 60여년 동안 왕의 외가와 처가 일족에 의해 세도정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써 권력은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국정이 운영되며, 비변사가 권력의 핵심 기구로 부상하면서 육조와 의정부가 무력화되었습니다. 순조 시기에는 대왕대비 김씨와 그 일파인 안동 김씨가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고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습니다. 김조순과 박종경 등 안동 김씨와 반남 박씨는 정계의 주요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외가와 세자빈의 가문을 기용하여 권력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순조의 재위 후반기에는 김좌근과 일가 친척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하층민을 착취하였습니다. 뇌물수수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았던 이 시기의 세도가문들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 시각은 홍경래의 난을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와 반봉건적 성격을 강조하는 '농민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농민층의 계급투쟁론적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각은 홍경래의 난을 하나의 민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시각은 난의 주도세력과 농민층의 연대가 부족했던 점, 농민층의 참여가 난이 이미 시작된 이후에야 이루어졌던 점, 그리고 계급투쟁론을 조선 후기 사회에 도입하는 것이 이론적이었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이 두 시각은 엄격하게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봉건 권력의 교체를 우선시한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홍경래의 난은 삼남 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농민 항쟁의 수준은 더욱 높아지며, 농민들의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통해 항쟁의 의의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정주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관군은 성 내의 향교, 사당 등을 멀쩡하게 보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음을 나타내며, 기존의 유교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만주의 청나라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위험성도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조선왕조가 이미 청의 질서에 순응한 상황에서 반란군을 지원하는 것이 매우 희박하다는 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리청정

아들효명세자는 매우 영특하여 아버지인 순조가 큰 기대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능한 임금으로 스스로를 자처하며 세자에게 여러 번 양위 선언을 했습니다. 이때 대개 양위나 대리청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보통 온 나라가 뒤집혀서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효명세자에 대한 대리청정 명령에 대해서는 오히려 모든 신하들이 종사의 무궁무진한 복을 찬양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영조 시절에 순조의 아버지인 정조의 대리청정을 극렬히 반대하다 죽은 홍인한을 크게 의식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대신들은 순조가 진정으로 통치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순조는 그의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에 비해 통치욕이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적당한 은퇴와 휴식을 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말년

순조 말년 효명세자는 조정의 기강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며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 몸에 샀습니다. 그러나 병에 걸려 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순조의 두 딸 또한 사망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순조는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8살 헌종이 이어받았습니다. 순조의 병은 한의학자들이 화병으로 판단했으며,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재야에 있던 정약용을 불러왔지만 정약용이 도착하기 전에 순조와 효명세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정약용이 순조와 효명세자를 돕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평가

순조는 정조의 무기력한 어린 아들으로서, 병약하다는 이유로 존재감이 옅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암군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강했으며, 효명세자의 단명 후에는 국정을 방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세도정치가 발전하게 되었고, 순조의 무기력함은 국가적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세종대왕과 중종과의 비교에서도 순조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세종은 똑똑한 세자를 가졌으며, 대리청정을 맡겨 통치에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순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으며, 정치적인 무기력함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물론 중종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쇠퇴하고 있는 시기에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종과는 다릅니다. 또한 정치적인 혼란과 부패가 심각했던 시대에, 새로운 세력이 조선의 안정을 위해 힘을 보태지 못한 것도 순조의 실패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하여 순조의 통치는 조선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세도정치의 서막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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