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제 시절
1721년, 경종이 즉위한 후, 이복 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여 후사를 도모하라는 노론의 제안으로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그 후 노론은 대리청정까지 건의 했지만 이러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 세력은 경종의 반역과 불충 의혹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대신과 50여명의 고관들은 사형당하거나 유배, 투옥되는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연잉군은 이에 따라 큰 지지 세력을 잃게 되었고, 박상검과 문유도의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도 받았습니다. 이에 소론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경종은 건강이 약해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노론과 완론파 소론은 여전히 연잉군을 지지했고, 경종비선의 왕후는 후사를 삼아보려했으나 논란이 되었습니다. 1724년 8월 25일, 경종은 갑작스레 병으로 별세했지만, 그 사인은 불분명하여 독살설이 유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후에 영조의 재위기간 동안 계속하여 논란의 여지가 남게 되었습니다.
경종 독살설
영종은 경종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신중함이 요구되었고, 그의 죽음 이후에는 자신이 경종을 죽인 것으로 의심받는 등 권위가 약해졌습니다. 이때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영조가 음식을 이용하여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게장과 생감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주로 야사 수준의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사람들로부터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겪었습니다.특히 경종이 죽기 전, 그의 병세가 심각했던 시점에서 독살설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사건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걱정과 충성심으로 그랬다고 영조는 두둔 한 적이 있습니다.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주장에 대한 진위는 여전히 불분명하며, 영조는 그런 비난에 대해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임금의 말에 쉽게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불행한 상황에서도 신임 옥사로 인한 세력 부족으로 자신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족했습니다. 노론 세력이 약화되었고, 경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는 인물들도 영조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종의 독살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이인좌의 난
윤휴의 손자 사위인 남인이 인좌가 소론 강경파와 남인을 규합하여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초거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 지역에서의 반란은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충청도에서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망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거병하였으나 전라 감사 정사효의 배신으로 인해 와해되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정희량 등이 거창과 합천을 점령하였지만, 안동 등에서는 근왕의 병이 일어나 저항이 컸습니다. 결국 이러한 반란은 조선 중앙군의 반격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포함하여 소론과 남인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도 소론 탕평파 정권을 유지하였으며,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책을 계속하여 추진하였습니다. 이로써 영조는 조선의 안정과 조화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이인좌의 난까지 진압한 영조는 조선 마지막 공신으로 '분무공신(奮武公臣)'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제도
영조는 조선 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민중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안정을 증진하기 위해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거나 개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금주령을 내려 사치와 낭비를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또한 기민의 상황을 조사하여 구제하고, 세금 부담을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제의 합리화를 추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방 대책에도 힘썼으며,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시행하고, 화차를 제작하여 수어청에 총의 제작을 명하고 진을 설치하여 각 보진의 토성을 개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조세 수입을 늘리고, 노인을 위한 기로과를 신설했습니다. 이렇듯 영조는 국가를 이끄는 모범적인 지도자로서 민중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민생의 안정을 위해 힘썼으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조세 수입을 증가시키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세자와의 갈등과 임오화변
영조는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고 왕위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도세자인 자신의 아들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영조의 자격지심과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능력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교육에 과도하게 열중하며 신하들과 사도세자를 면박하고 학대했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지속적인 몰아붙이는 질책과 학대에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매일같이 "너는 왜 이거 밖에 안되냐"는 식으로 계속해서 비판을 퍼붓었고, 심지어는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석고대죄를 반복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학대는 사도세자의 정신적 고통을 야기했으며,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신하로 취급하며 계속해서 핍박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리청정을 통해 후계자의 자격을 검증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간섭과 질책을 멈추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사도세자를 왕세자로서 보다는 자신의 신하로 취급하면서 더욱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부왕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후계자로 선택하는 대신 손자인 세손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방해가 되는 사도세자를 죽이고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썼으며, 이로 인해 신하들의 반대를 받았습니다. 임오화변은 이러한 영조의 결정으로 인해 정치적인 불안을 초래했으며, 그 후 정조가 세도정치를 이끌면서 더 큰 문제로 번질 것을 예상했습니다. 영조는 손자인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아들과 손자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장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말년
영조는 말년에 기로소에 들어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후, 1776년(영조 52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이 당시 조선 후기에는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 수가 줄어들었지만, 영조는 국상 당시에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주도복, 이상호 등의 선비들을 특별히 상을 내려 포상하기도 했습니다. 재궁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 구리시)의 동구릉의 원릉에 안장되었습니다. 현재의 원릉 자리는 원래 그의 증조부인 효종이 안장되었다가 이장된 자리이기 때문에 여러 번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그대로 현재의 원릉 자리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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