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옥엽
후궁 출신인 장씨의 아들로 태어난 숙종은 아버지에게 귀한 아들이었으며,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희빈 장씨의 배경으로 인해 권력과 총애를 누렸습니다. 희빈이 중전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그의 지위는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의 정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제압하고 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어머니가 후궁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면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대우했습니다. 어머니 희빈의 사건으로 인해 숙종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머니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그의 부탁은 무시되었습니다. 이후 윤증의 추탈로 인해 상황은 악화되었고, 경종 또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경종의 병세를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리청정 기간
숙종의 말년에는 부왕으로서 심각한 병으로 쓰러지게 되어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노론의 이이명이 세자를 연잉군으로 바꾸려는 목적으로 대리청정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경종은 대답을 피하고, 노론의 신하들은 때때로 의견을 내놓고 물어보라고 조언했지만 경종은 항상 "유의하겠다"라는 일관된 대답만을 했습니다. 유일하게 경종이 신하들의 요구를 거부한 경우는 처벌 요구였는데, 이는 그 시점에는 집권세력이 노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은 세자가 큰소리를 내며 단호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승지 유숭이 지각을 하자 세자는 분노하며 성을 내었고, 이에 당황한 대신들과 승지들은 세자 앞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후 세자는 자신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점을 인정하고 승지들에게 다시 입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폭발은 작은 일을 계기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숙종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비난하고 질책했지만, 소론 신하들은 숙종의 입장을 받아들여 이 사건을 넘어갔습니다.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경종은 아버지인 숙종이 승하하면서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숙종이 더 재위 했다면 왕위를 물려 받지 못했을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조선은 왕 마음대로 세자를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였고 조선 역사상 최장 기간인 30년간 세자로 지내며 쌓인 권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쉽게 폐세자가 되진 않았을 겁니다.
재위기간
경종은 즉위 이후 재위기간에 노론의 반발과 대립을 겪었습니다. 노론은 조선시대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다수의 관료와 권력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경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자 했지만, 완전한 지지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노론의 지배는 궁궐 내부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부까지 이어지며, 그들은 경쟁 세력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론은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추진했고 대리청정까지 주장했습니다. 대리청정은 경종이 직접 왕정을 맡지 않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경종은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노론과의 대립을 지속했습니다. 이에 대한 노론의 항의는 경종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고, 노론은 경종을 죽이고 새로운 지도자로 이이명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종은 분노를 표출하며 노론을 엄중히 처벌했습니다. 그러나 경종은 소론에 대해서는 관대했고, 그들의 공격 수위를 낮추었습니다. 경종은 주변의 이간질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보호하여 왕위 계승을 원활하게 했습니다. 노론에게 엄중한 처벌을 가하고, 동시에 소론과의 타협을 통해 궁중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경종의 행동은 그가 왕실의 리더로서 책임감 있고, 형제 간의 갈등을 조절하고 조선의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와 상관없이 왕위 계승을 위해 헌신했으며, 조선의 발전과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경종의 노력은 조선 왕실의 안정과 권위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망
세자시절부터큰스트레스를받는상황에처해있었던경종은즉위후에도몸이좋지않았고,결국1724년에는즉위후4년만에사망했습니다. 그는 소아비만, 다한증, 다뇨증 등 다양한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설사병과 5,6월 염천에도 오한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상들을 고려하면 당뇨병, 고혈압, 신장 합병증 등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독살설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는 병사가 아닌 독살로 인한 사망설이 소론과 격파를 중심으로 퍼져갔습니다. 특히, 단의왕후의 남동생인 심유현 등 소론과 격파는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론을 중심으로 확산된 독살설은 김일경의 모의 사건을 시작으로 이천해의 난동,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등의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 사건은 오랜 시간 동안 영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논쟁의 소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주괘서사건에서는 주모자인 신치운이 경종의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조는 분통을 터뜨려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영조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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